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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고양이 Nov 20. 2023

고생 경쟁

우리 가족은 이상하리만치 모이기만 하면 서로 고생한 얘기로 경쟁을 벌인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던 이야기가 세월이 흐를수록 각색이 되기도 했고 양념도 쳐진다.      

좋은 추억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겨워지기 마련인데 왜 고생한 얘기들로 분위기를 망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나는 언제나 입을 꾹 다문다.                          

시작은 역시 아빠다.      

어릴 적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셨다.           

소풍날 하이라이트인 점심시간.

도시락을 꺼내는 친구들 사이에서 부끄러워 꺼내지 못한 죽이 담긴 유리병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짠하다.      

결국 그 죽이든 병은 꺼내지 못하고 수돗물로 허기를 채웠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없는 동산에 올라 굳어버린 죽이 나올 리 만무하지만, 나뭇가지로 쑤셔도 보고 손가락도 넣어보며 허망하게 바라보며 한참을 울었단다. 까까머리 어린 아빠가 병 주둥이를 입에 갖다 대고 연신 병 바닥을 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 걸 생각하니 내 속이 다 쓰리다.           

둘째 언니는 이에 질세라 친척 집에 갈 때면 아빠, 엄마가 남자 옷만 입혔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큰언니와 막내에게는 명절이 되면 백화점에 가서 예쁜 원피스를 사줬고 공주같이 꾸며줬었다며      

왜 자신은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남자처럼 바지 정장을 입혔냐고 가뜩이나 못생겼는데 굳이 그렇게 해야 했냐며 아빠 엄마를 원망했다.           

그래서 친척 오빠와 삼촌들이 남자 장난감을 사줬고 못난 건 자기에게 주고 예쁜 건 다 막내 차지였다고 가만히 있는 나를 흘겼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손이 늘 땀에 흥건했었다. 

그때마다 걸레 손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떠올라 순간 내 얼굴은 달아올랐고 평생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고생담도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큰 언니는 “야! 내가 너희들 때문에 아빠, 엄마한테 얼마나 많이 맞은 줄 알아?”

나랑은 9살 차이가 있는 터라 부모님에 맞벌이 시절에는 엄마 노릇을 했단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해도 같이 혼나고 양보 안 한다고 혼나고 부모님이 싸우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이 중간에서 터진 모양이다.      

언니도 한참 놀고 싶고 어리광 부리고 싶을 나이였지만 첫째라는 이유로 “너는 우리가 없으면 부모다.”라는 말을 늘 상 듣고 자란 탓에 어른 아이가 되어 속앓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참다못한 앓는 소리를 했다.           

엄마는 벌써 이긴 얼굴을 하고 있다. 얼마나 한이 맺힌 게 많은지 뭐부터 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뭐라도 이기고 싶은 모습이 순수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나는 어색한 적막이 싫어서 “난 별로 고생한 기억이 없네.” 하니까 

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너는 태어날 때부터 고생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 한다. 

뭔가 이 게임에서 패자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언니들은 뭔가 이긴 듯 의기양양하다.          

그때 엄마가 “아니야, 막내도 눈물이 없이 들을 수 없는 얘기가 있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내가 모르는 고생한 사연이 있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도우려는 듯 나를 힐끔 쳐다보며 내가 서너 살 쯤인가. 잠옷 바지에 오줌을 쌌다고 아빠가 눈 오는 추운 겨울에 홀딱 벗겨서 내쫓았었다며 어떻게 자식한테 그러냐는 말까지 보태며 굳이 할 필요도 없을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내 한 방으로 연기처럼 흩어졌다.    

가장 어린 나이라 그랬을까? 고의성이 다분해서? 추운 겨울에 홀딱 벗겨진 수치스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남에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신빙성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입을 닫았고 아빠는 자리를 피했다. 

나는 애써 태어난 척하려 했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큰 언니는 네가 승리자라는 확신에 눈빛을 보내주었다.          

이겨도 진 듯한 이 기분,  

매운 닭발에 소주 한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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