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민음사
느긋하게
독서모임에 가려고 준비하다가
갑자기
직장 근처의 능소화가 생각났다.
집도 지고 있고
능소화도 지고 있고
오늘따라 하늘도 지고 있을
그곳.
오랫동안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
그곳에서
능소화는 계절을 따라 피고 지는 중
거기엔
15년간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고
복수의 그림자만을 짙게 드리운 한 남자 루드빅이 있었다.
"너무도 여러 해 동안 나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앞에 놓인 거울을 피해 눈을 위로 뜨고 석회를 철한 천장의 얼룩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필사적이고 집요하게 사랑의 그림자를 쫒는
또 한명
헬레나.
"필사적으로 집요하게 나는 사랑을 찾는다. 내가 언제나 나였던 대로, 지금의 나 그대로, 옛 꿈들과 내 이상들을 가지고 살아나가게 해 줄 그런 사랑, 내 삶이 환경에 의해 토막 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나는 내 삶이 하나로 온전히 남아 있기를 원한다. 루드빅, 당신을 만나 숨 막힐 만큼 그렇게 가슴 벅찼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에요, 루드빅, "
사진을 찍는 그 잠깐의 시간에도
하늘은
빛을 내어주고
어둠을 내어주고
비를 내어주었다.
구태어 그 하늘을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시간은 헤아려지고 있다.
"내가 무관심이라 불렀던 것은 실은 원한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라이트모티프가 다시 들려왔다, 멀리서 나의 젊음이 내게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로 내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내 안에 다시 누군가가 살게 된 것이었다. 나의 내면은 마치 방처럼 휙 청소가 되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게 되었다. 여러 달 전부터 바늘이 마비된 채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갑자기 다시 똑딱거리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와 아무 상관없이, 무에서 또 다른 무를 향해(나는 정지되어 있었으니까!), 아무 표지도 측량선도 없이 그저 무심히 흘러가던 시간이 점점 인간화된 얼굴을 다시 지녀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이제 다시 분명한 모습을 띠게 되고 헤아려지기 시작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뭘 찍는 건지
왜 찍는 건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나는 부끄러움 조절 차단기를 움직이지 못한다.
아직 그 계기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루비딕에게 루치에는 그러했다
"내게는 아주 작동이 잘 되는 작은 시스템, 즉 사람들 앞에서 너무 나를 내보인다거나 내 감정을 펼쳐 보이지 못하게 해주는 부끄러움 조절 차단기가 장착되어 있다. 그런데 루치에는 그 차단기를 마음대로 움직여 내 머뭇거림을 다 걷어내 버리는 마술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랑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들이 언제나 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던 상황들이 그런 계기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다."
둘,
셋,
넷,
피고 있는 다정함, 머뭇거리는 서글픔,
그리고 남겨진....
이곳
잃어버린 낙원
"도대체 어째서 나는 어른으로 심판받고 추방되고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언되고 탄광으로 보내지고 그렇게 모든 데에서 어른이어야 하면서 사랑에서만은 어른이 될 권리도 없고 이렇게 미숙해서 모든 창피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루치에가 말할 수 없이 미웠다.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알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것은 몸과 영혼, 욕망과 다정함, 서글픔과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였으며, 위안에 대한 갈구이자 동시에 저속함에 대한 갈구이고, 영원히 소유하고픈 갈망이자 동시에 한순간의 쾌락에 대한 갈증이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걸고 있었고, 한 곳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이 순간들을 잃어버린 낙원으로 기억한다"
"돌연 미칠 듯한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어떤 초자연적 힘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내 손에서 내 삶의 의미이자 내가 열망하는 것, 내게 속하는 것을 모두 계속 앗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 힘이 내게서 당과 동지들과 학교를 앗아간 것 같았다. 매번, 언제나, 내가 어떻게 하건, 아무 이유도 없이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리는 힘. 나는 이 초자연적인 힘이 루치에를 내게 맞서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그 힘의 도구가 되어 버린 루치에가 너무도 미웠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내리쳤다"
루비딕에게 루치에는
또 한 번의 농담과 같았을까!
내가
처음
사진을 좋아하게 된 것도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하나의 장면이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었다.
나에게로 향해 있는 측면만
내 눈에서 체험되는 상황만이 아닌
간과되어지는 모든 것들에서 보이는 그 무엇이었다.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있겠는가"
"나는 루치에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녀 자체로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 (청년기의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나에게로(나의 고독, 나의 예속, 애정과 사랑에 대한 나의 욕구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나는 문득, 왕이 아니라 여왕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루치에 여왕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러 온 것인지도 모르지. 그녀의 본래 모습은 베일에 감추어진 모습이니까."
약속된 시간이 되어간다
모임 장소인 카페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아,
무궁
무궁
무궁
무궁화나무가 대문을 넘어서 있다.
"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재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 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의 물결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가겠는가.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모든 화해의 기회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하였다."
물론
세상은
지금도
온통
보색의 대비 속에 놓여 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나는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그들을 높이 사.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우리는 무시했잖아. 그들은 여행을 좋아해. 우리는 한 곳에 처박 혀 있었는데.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지. 우리는 회의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는데 말이야. 그들은 재즈를 좋아해. 우리는 부질없이 민속 음악이나 흉내 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골몰해 있지.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고. 우리는 우리의 메시아주의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릴 뻔했지. 이제 그들이, 그들의 이기주의를 가지고 이 세상을 구하게 될지도 몰라"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분명 무언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장려하고도 불가해한 몸짓으로 군중에게 긴 연설을 하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 웅변가 같은 후손들에게서 오늘날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결코 해독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주 오랜 메시지와 새로운 메시지들이 서로 겹겹이 겹쳐지고 쌓여가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조차 되지 못하는 그런 시대에, 이제 사람 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런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서로에게 해독되지 않을...
보색
때론
차갑고
때론 뜨거운
농담 같은 인생을 논하러 모인
열 사람
시대의 거울 앞에 나를 놓고
나의 거울 앞에 시간을 놓고
시간의 거울 앞에 삶을 놓은
독하게 따뜻했고 슬프지만 유쾌했던
각자의 농담
"그렇다,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나의 패배를 알리는 전보가 십오 년 동안이나 나를 쫓아다닌 끝에 내게 도착한 것이었다."
"내가 당신을 이해는 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에 대한 그런 식의 증오는 끔찍한 것이고 죄악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 증오는 당신의 저주가 되어버렸어요.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 요. 루드빅,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
루비딕은 차라리 그때
제마넥의 따귀를 때리고
발 뻗고 자는 편이 나았을지도...
때리려 했을 때 이미 그는 그가 아니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농담 같지 만은 않은 농담의 이야기들
개인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잘
정돈된 듯
잘
흐트러진
이 카페에 묻고 일어설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나의 공포는 거기에서 온다. 이제 제마넥은 언제든 자신이 변했음을 (게다가 그는 방금 의심스러우리만치 기민하게 이 점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선언할 수 있고, 내게 용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카페를 나오다
문득,
한쪽 구석
초록을 잃어가는 두려움에서도
항복을 거부한 채
마른 줄기를 뻗어내고 있는 덩굴에서
돌아앉은 등이 느껴진다
"그녀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자기 안으로 움츠러든 채. 그 녀의 등에서 나는 두려움을 읽었다. 그렇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항복을 거부했다. 그녀는 수프를 젓는 것을 그만두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나무 숟가락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그녀를 구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
굳이
같이 타고 가자는
차들을 먼저 보내고
뒤풀이 장소를 향해 걸어가는 길
또
능소화다
꽃이 아닌
툭툭 끊어지고 가려진 듯 던져진
투박한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왜 왕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나의 시간을 돌아본다.
수많이 올려다보기만 했던
씌워지고 써야 했던 허영의 가면을 벗고 나서야
오롯이 마주하게 된
모든 것에 달라붙어 있는 비루하고 초라한 나의 모습들
하지만
그 초라함 속에서 찾은 진정으로
어쩌면 이제야 나는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최악의 것을, 허식과 겉치레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행사가 시 작될 때부터 이 축제를 짓누르고 있는 분위기, 이 서글프고도 가슴 저미는 〈초라함〉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다. 그 초라함은 모든 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아니다. 내가 돌연 이 세계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지 제마넥의 냉소 덕분만은 아니었다. 내가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아침, (뜻밖에도) 이 세계를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이 세계는 정화되었다. 나에 대한 꾸짖음으로 가득한 이 고독은 마치 얼마 살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이 세계를 정화시켰다. 그 고독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최후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계를 눈부시게 빛나게 하고 있었다. 이 고독이 그 세계를 나에게 되돌려준 것이었다."
끊어진 것을 이으려 말길
쓰러뜨리기 보다 두 팔로 안길
농담은 의도와 상관없이 해석하는 순간 그 효력을 잃게 된다.
소풍처럼 다니러 와서
농담 같이 살다가는 인생이라 하여도 뭐 어떨까!
농담의 마지막 페이지를 옮기며 마무리한다.
"그리고 나는, 증오의 대상 제마넥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그렇다, 나는 그 순간, 그를 두 팔로 안고 있는 나, 마치 나 자신의 확실치 않은 죄를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거대하고 무거운 그를 안고 가는 나, 군중 사이를 헤치며 그를 옮기고 있는 나, 눈물 흘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능소화빛 문장들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혼자 책을 읽고 말았다면
아마도 이런 시간을 이런 문장을 제 것으로 갖지 못했을 겁니다.
작년.
대구 책 모임 "대책회의" 독서 모임을 다녀와서 쓴 글을 옮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