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 하더라고 상처는 상처일 뿐이다.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던 중 몇 년 전 끄적여 놓은 습작시들을 끄적여 놓은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모아 놓았던 종이들을 한 장씩 넘겨가며 끄적이던 때를 기억하려 했다.
그중, 기억의 저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감정을 끌어올리는 습작을 대하였다.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차분해진 감정들이지만 당시의 나는 내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매일이 우울하고, '이런 대접받으려고 내가 이 직업을 택했냐'부터, '사람이 이런 감정이면 자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비참과 원통, 내가 부정당하는 느낌, 복수하고픈 마음 등등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감정에 휘둘리며 감정과 나의 정신을 갉아먹었던 시간들...
그때부터 '이 직장에서 버티자. 버티다가 내가 정말로 필요할 때 그만두자'라는 생각을 하며 견뎠다.
그런 시간을 버티는 중에서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부산을 여행하기로 하고 혼자 훌쩍 부산으로 떠났었다. 그리고 찾아본 영도의 내가 살던 동네, 그 영도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위치했던 대교동을 찾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운영했던 철공업공장이 있던 바닷가, 친척 외할머니가 살아 그 집, 내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이 있던 골목길, 학교를 오갔던 길들, 버스정류장 등등.
그렇게 당시에 긁적였던 시 몇 편이 책장들 사이에 숨어 지내다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시들을 보며 슬그머니 올라온 감정들은 그때의 내가 느꼈던 그런 감정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의 비참함과 원통함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감정들이라 잠깐 먹먹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감정도 기억도 희미해져 버린 과거가 되어 버렸다.
시를 정리하여 옮기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 박제화 되어버린 듯한 나의 메마른 감정이 나를 당황케 하면서도 냉정해진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다. 그때의 그 시간들이 나를 공부하게 하여 지금의 내가 되게 한 것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오죽하면 지금도 그때의 그 감정들을 가지게 해 준 원인제공자가 고맙기도 하지만 괘씸하기도 하다. 좋은 결과가 있어 좋은 것이라면 그때의 사건은 좋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 사건으로 거의 1년을 가슴앓이 하며 쓰레기가 되어버린 듯한 나의 인생이 참 가여웠던 시간들이라 나에게는 상처이다.
지금은 그때의 사건을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 생각하면 내 사고관을 바꾸게 하는 사건이었다. 내 직업관을 바꾸고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고,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획하게 해 준 사건이라 생각한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현재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지는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사건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간직하는 아픔의 기억으로는 고마운 일이 아닌,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은 사건이기도 하다. 시간이 약이라 하더라도 상처는 상처일 뿐이다. 상처를 주는 고마운 사건은 없다.
그래서 그 과거의 내가 느꼈을 감정이 서러워 그 시를 정리하여 내 매거진 '벽우의 끄적임'에 옮겼다. 그리고 이렇게 그 시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여 남긴다. 현재의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미래의 내가 되기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