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면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Nov 21. 2023

나의 명품 가방

만원과 사만 원짜리

아파트 상가를 지나가 소품가게의 에코가방에 눈이 멈췄다. 주황색에 디즈니 만화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들어가 4만 원에 샀다. 에코 가방치고는 가격이 좀 되었지만 주인이 직접 한 땀 한 땀 만든 핸드메이드 작품이었다. 명품이었다. '경이네'. 기꺼이 지불했다. 그녀의 노고와 솜씨에 찬사를 보내며.     


구독하고 있는 유튜브 '지식브런치'에 명품이 비싼 다섯 가지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명품이라는 것은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이 사용하던 사치품(Luxury)이었는데 명품으로 번역된 것이다. 첫째, 태생부터 비싼 물건이다. 둘째, 좋은 재료와 장인들의 솜씨로 만들어져서 원가 자체가 비싸다. 셋째, 예술적 가치(자기 과시와 자기만족)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기술 좋은 독일차 보다 ‘문짝이 안 맞아도 마세라티(이태리차)를 탄다’는 말이 나온다. 넷째, 위치재(상대가치와 사회적 가치)로서 희귀성을 유지해 계속 높은 가격으로 판매한다. 심지어는 구매자를 심사한 후에 물건을 팔기도 한다. 다섯째, 비싼 물건을 상대적으로 싼 물건들 중앙에 배치해서 합리적으로, 세일처럼, 헐값으로, 거저처럼 보이게 하는 닻 내림효과(Anchoring Effect)로 높은 가격을 유지다. 결국 명품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욕망(과시, 차별, 인정, 소유, 자기만족)의 결정체이다.      


나는 소위 명품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봐도 잘 모른다. 뭐가 몇 천이고 뭐가 몇 백이라고 듣기만 했다. 나 같은 소시민으로서는 그 명품의 가치를 살 만한 돈도 없고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니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 백팩과 크로스백과, 여기저기서 얻은 몇 개의 에코 가방이면 길 떠나는 나의 서랍이 되기에 충분하다. 교통카드를 고리로 연결하고, 책 한 권 넣고, 폰을 안쪽 서랍에 안전하게 넣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에코백 가운데 20년을 써서 끈이 헤어진 것이 있다. 이중으로 되어 있어 탄탄하고 겉감에는 말 모양의 로고가 다양하게 찍혀 있고 안쪽에는 지퍼 달린 주머니까지 있어 애용하였다.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매대에서 만원 주고 산 것이다.

      

박사논문 쓸 때 사건이 일어났다. 집에 돌아왔는데 에코백이 없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논문 자료와 초고 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타고 왔던 전철에 두고 내린 게 분명했다. 내 논문이 공중 분해될 참이었다. 전철 여기저기 연락하여 분실물센터로 갔다.

12시가 다 된 늦은 밤이라 남편이 따라나섰다. 남편은 한 마디의 질책도 없이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주었다. 사실 박사논문도 남편의 권유로 간신히 시작하였다. 심한 우울증으로 오래도록 포기하고 있던 나를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시작했으니 끝내자고. 그런 남편의 정성과 배려가 깊게 배인 가방이다. 분실물센터에 가서 눈에 익은 가방을 발견하니 심봉사가 눈을 뜬 듯 반가웠다. 그 사연 이후로 그 가방은 더욱 특별해졌다. 학교 근무가 끝나고 도서관에서 날밤을 새우는 모든 날들 동안 내 곁을 지켰다. 24시간 개방하는 열람실은 대학생들의 열기로 가득하였다. 나도 그 속에서 마지막 남은 향학열을 불태웠다. 어느  새벽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온 천지가 눈이었다. 차가 눈에 묻혀 운전을 할 수 없었다. 그 새벽 한 발자국씩 내딛는 걸음걸음도 가방이 함께 하였다. 나의 분신이 되었다. 나의 진정한 명품 가방이 되었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내 가방을 가리키며 ‘말! 말!’하였다. 사실 말 문양이 어른들도 알아보기가 힘든 도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쉽게 알아보았다. 똑똑한 딸을 둔 그녀의 엄마나 주위의 사람들도 한참 들여다보고서야 알아차렸다. 나의 명품 가방에 시선을 준 정말 귀여운 소녀였다. 그녀의 명민함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나의 20년 된 명품가방이 어느새 끈이 다 닳아 헤어졌다. 끈을 수선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새 주황색 가방이 눈에 들어온 이유이다. 가방의 면면을 살피니 더욱 마음에 든다. 이태리의 중국인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요즘 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진짜 명품이다. 끈이 약하다 했더니 다른 에코백 끈으로 보충하여 든든하게 만들어준다. 고객의 요구에 맞춤 서비스까지 훌륭하다. 끈도 이중으로 되어있고 겉에도 주머니가, 안에도 지퍼 달린 주머니가 있어서 수납공간이 완벽하다. 책과 태블릿을 넣고 글쓰기 길을 떠나기 제격이다. 앞으로 20년도 견딜 것 같다. 그때까지 살 수 있다면 이 가방도 나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삶의 때를 묻히고, 사연을 만날 것이다. 색이 바래고 낡아갈 것이다. 진정한 명품이 될 것이다. 

어떤 사연들을 만나게 될까.



매거진의 이전글 '방방파'와 '관관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