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을 꽁꽁 싸매 안은 채 정신은 깊은 동면에 빠지려 하는 시기가 왔다. 곰은 겨울을 나기 위하여 에너지를 비축하고 인간들은 겨울을 나기 위하여 가슴에 저마다 별들을 품기 시작한다. 온갖 반짝이는 것들이 여기저기서 눈과 마음을 유혹한다. 곱고, 예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이때다 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따뜻하고 깊은 동굴을 찾고 싶은 본능은 동화 속 세계와 판타지를 꿈꾸게 한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즐기고 느끼고 그 안에서 동심을 찾고 안정을 구한다. 그래야 겨울을 견딜 수 있다. 대학교 때까지도 초겨울만 되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동화책을 닥치는 대로 읽곤 하였다. 그 판타지의 힘으로 춥고 가난한 겨울을 버티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부잣집에 팔려간 뒤 할아버지를 위해 흰 빵을 감춘다. 할아버지를 그리워한 나머지 몽유병까지 걸린다. 할아버지와 헤어져 부잣집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동화는 해피엔딩이지만 빵과 몽유병과 크리스마스는 영원히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동화를 좋아했던 나는 마음의 허기가 지면 빵을 찾곤 했다. 반짝이는 유리창 너머로 진열되어 있던 빵은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동화의 세계였다. 유리창 안은 행복하고 달콤한 세계였다.
성냥팔이 소녀가 들여다보았던 따뜻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풍경은 다다를 수 없는 세계다. 일순간에 사그라지는 성냥불처럼 신기루에 불과하다. 돌아갈 집이 없는 어른들은 모두 성냥팔이 소녀가 된다. 부자 어른들은 소녀의 죽음을 알리 없고, 춥고 배고픈 어른들은 소녀의 죽음을 느낄 겨를이 없다. 크리스마스 따위로 마음의 위안을 삼을 여유도 없다. 결코 동화가 될 수 없는 동화다.
호두까기 인형. 크리스마스 풍경과 달콤함을 가득 담고 있다. 부서졌던 인형이 클라라의 꿈속에서 왕자로 변한다는 판타지다. 가장 동화다운 이야기다. 생쥐왕의 습격으로 곤궁에 빠진 호두까기 인형과 병사 인형들을 클라라가 구해주자 호두까기 인형이 왕자로 변신해 과자 나라로 초대한다. 호프만의 이야기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으로 재탄생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공연된다.
‘발레 판타지아’. 경기 아트센터 연말 발레 갈라공연이다. 곱고 아름답고 반짝이는 모든 것들의 집합체다. 유난히 발레공연은 이 계절에 잘 어울린다. 관중들을 동화의 나라, 판타지의 세계로 이끈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아름다운 동작과 화려한 의상은 그것 자체가 판타지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는 역시 호두까기 인형이다.
온갖 춤과 음악의 향연. 눈의 왈츠, 사탕요정의 춤, 러시아·아라비아·중국의 춤, 꽃의 왈츠 등. 춤 주위로 날아 오르는 음악까지도 반짝거린다. 어느 때보다 어린 관중들이 많다. 역시 동화의 계절이다. 어른들도 함께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든다. 겨울을, 현실을 견뎌낼 힘을 비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