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Feb 27. 2024

가미가제 정신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재현

플랜 75(2022. 일본. 하야카와 치에 감독)

국가에서 운영하는 안락사 공장. 75세 이상이 신청할 수 있고 신청하면 10만 엔을 준다. 그러나 사체처리는 산업폐기물 업체에 맡기고, 안락사 순간 기계 고장으로 주인공은 죽지 않고 살아서 탈주한다. 어디에도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없다.      


미치. 78세의 홀로 사는 노인. 호텔에서 일하다 잘린 후 일을 구하지 못하자 결국 ‘플랜 75’를 신청한다.

히로무. ‘플랜 75’의 담당 공무원. 신청 창구에서 삼촌을 만나지만 해줄 것이 없다.

요코. 콜센터 해지 방어팀. 신청자가 신청을 해지하지 않고 무사히 죽어줄 때까지 변심을 하지 않도록 매일 전화로 15분씩 통화한다.

마리아. 필리핀 이주 노동자. 고국에 있는 심장병 딸을 위하여 급여가 좋은 ‘플랜 75’의 유품 정리를 하게 된다.      


영화 전체가 가지고 있는 발칙한 상상도, 첫 장면도 충격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K. 545)가 흐르는 가운데 한 젊은이가 휠체어에 있는 노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살한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노인들은 죽어 줘야 한다며, 그 사실을  공론화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미가제 정신이다.

그 사건으로 ‘플랜 75’라는 법안이 통과되어 실행된다. 노동력도 경제력도 없어서 국가 전체에 짐만 되는 노인들을 합법적으로 대량 학살 하자는 법이다. 새로운 홀로코스트다.

가미가제 정신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재현이다.

이제는 전쟁이 아니라 벌건 대낮에 일상에서 합법적으로 살육이 자행된다. 법이라는 허울을 쓴 광기이다. 어쩌면 가장 동물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75세 이상은 자유롭게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다. 신청자에게는 10만 엔이 주어진다. 가족 없고, 돈 없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주 대상일 수밖에 없다. 고위층이나 부유층은 저절로 제외된다. 그 사실을 입법하는 그들은 익히 알고 있다. 몇 년 후에는 ‘플랜 65’도 준비한다.      

민간업체들이 개입하여 요란하게 홍보를 한다. 납골당을 홍보하듯이 안락사 장소를 홍보한다. 마지막을 초호화 시설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받으며 죽으라고. 신청하며 받은 10만 엔마저 갈취하려는 상술이다. 오로지 돈과 물질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인간의 죽음이 결코 존엄사나 안락사가 될 수 없는 풍경이다.    

  

미치와 마지막까지 통화로 연결되어 있던 요코는 갈등을 느낀다. 금지되어 있는 신청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미치에게 마지막 행복한 시간을 선물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들어가 있는 장치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움직일 뿐이다.     


플랜의 담당 공무원 히로무는 몇십 년 만에 삼촌을 신청 창구에서 마주한다. 도와줄 수도, 만류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그러는 사이 사체들이 산업폐기물업체로 넘겨져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삼촌이 안락사당하는 날, 달려가서 사체를 끌고 나온다. 제대로 된 화장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반려동물의 사체도 고이 화장하여 납골을 하는 시대에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그 사실도 모른 채 어쩔 수 없이 죽어 간  삼촌에 대한 마지막 예우이다. 인간 사체가 동물 사체처럼 취급되는 세상에 대한 미약한 저항이다.     

 

요양원 같은 분위기의 안락사 공장. 수많은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고, 사이사이 커튼이 쳐져있다. 옆의 침대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는 환경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가미가제 특공대의 임무를 수행한다. 90년 전 그랬듯이 지금도 국가를 위하여 장렬히 전사한다. 음산한 건물 전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떠올린다. 대량학살이 자행되는 곳이다. 인간에게는 미래도 희망도 없어 보인다.

그 암울한 공간 속에는 이주 노동자 마리아가 있다. 유품정리를 담당한다. 히로무가 삼촌의 사체를 빼내는 것을 도와준다. 타인의 시선으로 일본 사회의 적나라한 치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힘든 이주 노동자의 삶이지만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 속에서 끈끈한 유대를 형성한다. 힘들고 가난하지만 함께한다는 희망으로 그들은 행복하다.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회와 연대가 깨진 사회의 극렬한 대비이다.    

  

끝까지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신청하게 된 미치. 기계장치 오작동으로 살아서 탈주한다. 공장에 불량 상태 발생이다. 이 공장의 불량률은 얼마일까. 살아 나가서 어쩌겠다는 계획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멀리 마을을 내려다보며 숨을 마음껏 쉬면서 살아 있음을 느낄 뿐이다.      

 

머지않아 우리 사회에 등장할지도 모르는 풍경과 광기는 그 어떤 호러 무비보다 오싹하다. 인명경시, 생명경시가 만연한 사회에서 홀로코스트가 다시 재현될 조짐을 영화는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권유하는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사회라니. 다가올 미래에 대한 끔찍한 상상. 상상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통의 카스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