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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Jun 16. 2024

걷다 보니

나는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한다. 무작정 길을 나서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 만보도 좋고 이만 보도 좋고 동서남북으로 모든 공원과 길과 골목들을 헤집고 다닌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어둠의 기운을 떨쳐내고 생명력을 느껴본다. 살아서 몸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내가 사는 곳은 아파트단지 전체도 공원이고 동서남북이 전부 공원이다. 시냇물 따라 도서관까지 1.2km 양쪽 산책길은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비바람이 날리는 봄길을 걸으면 고즈넉하고 서글퍼서 좋고, 벚꽃들이 토해낸 눈부신 아우성 아래를 걸으면 아이들의 함성과 감탄이 벚꽃장막 아래로 퍼져나가는 안온한 분위기가 좋다. 모두가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마음을 마음껏 분출하면 나까지 염색된다.      


나는 원래 걸음이 빠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빠른 걸음을 따라 걷다 보니 저절로 빨리 걷게 되었다. 젊어서는 나의 빠른 걸음을 놀리며 연애 한 번 못해본 것 같다고 했고, 여자가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빠르냐고도 했다. 데이트하려면 둘이 천천히 보폭을 맞추며 걸어야 할 테니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여자라고 빨리 걸으면 안 된다니. 여럿이 걸을 때도 나는 앞쪽에서 먼저 걷는다. 다른 행인들을 방해하지도 않고 혼자 편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다. 일행은 나를 찾느라 뒤를 돌아다보기 일쑤다. 저만치 앞에서 나를 찾으시라. 상대방에 맞추어 느리게 걷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다. 내 호흡과 리듬이 깨지면서 몸과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 불편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홀로 걷는 것이 좋다.      


남편은 유난히 걸음이 느리다. 내 속도의 3/2 정도의 빠르기다. 처음에는 같이 걸어 주지 않는다고 화도 냈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인 남편은 내 뒤에 천천히 걷는 쪽을 택했다. 안암동에 살 때는 주말마다 북한산을 오르던지 북한산 레길을 걷던지 하였다. 산에서는 거리가 너무 벌어지면 영영 이별하는 수가 있다. 어디까지만 부지런히 먼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서 남편을 만나면 다시 오르고, 다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고를 반복하였다. 결과적으로 남편보다 3/1은 더 오르는 셈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사달이 났다.

북한산 둘레길 평창동코스를 돌던 때였다. 그곳은 유난히 마을길들이 여러 갈래로 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남편이 안보였다. 얼기설기 빈 골목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가던 길을 가는데 전화가 와서 노발대발이다. 100년짜리 삐짐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나서 무조건 싹싹 빌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을 뿐인데. 그 이후로는 자주 뒤를 돌아보며 잘 따라오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은 멀리 수원천을 따라 3.3Km를 걷는다. 무작정 가다 보니 닿을 수 없을 듯 아득하기만 하던 목표가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다. ‘어라. 벌써 다 왔네. 나 축지법 쓰네.

처음 수원천을 따라 3Km(50분, 6 천보)를 넘게 걸으려는데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처음에는 멀게만 느껴졌다. 세류중학교에서 시작하여 매교역 근처를 지나고, 수원의 온갖 시장들이 모여있는 시장통을 지나고, 팔달문을 지나 팔달구청 근처의 한옥카페까지 꽤나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천변의 양쪽 산책길을 따라 차도 신호등도 없는 쾌적한 길이다. 신호등 따위 때문에 멈추지 않아도 되고, 온갖 꽃과 새들로 눈과 마음이 즐거워진다. 간간이 흔들 벤치도 있어서 비어 있으면 몸과 마음을 한 번씩 흔들어 주기도 한다. 저절로 동심으로 돌아간다. 시장통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관찰하기도 하고, 잠시 옆의 벤치에 앉아 그들이 주고받는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막장 드라마 서너 편은 족히 될 이야기들이다. 노인들의 로맨스가 흥미진진하다. 다리 아래에는 트럼펫 연주자가 버스킹을 하고 있다. 잠시 멈춰서 그의 음악세계에 빠져든다. 꽤 훌륭하다. 위로 차가 다니는 넓은 다리는 그 자체가 좋은 음악홀이 된다. 소리의 울림이 다리 밑으로 낮게 퍼지면서 긴 여음을 만들어 낸다.

한옥카페에서 한옥을 흐르는 시간과 커피를 즐긴다. 한옥이라는 공간은 벽을 열어 공간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안과 밖이 없다. 공간 따라 생각마저 외연을 끝까지 확장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정취가 살아난다. 처마에서 흐르는 빗줄기와, 처마와 처마 사이 중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영원히 심상에 새겨지는 그림이고 음악이다.  순간 시간이 멈추고 자유가 흐른다. 이 목표를 향하여 먼 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며칠을 왕복하여 걸었더니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서 목표가 저기 보인다. 아무래도 며칠 만에 축지법을 터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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