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공원과 곰배령 야생화
땅에 쓰는 시(2024. 정다운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가 시작되고 어린아이가 공원을 이리저리 마음껏 뛰어다니고 있었다. 첫눈에 선유도 공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밤마다 뛰어내릴 자리를 찾아 한강다리를 4시간씩 건너 다니던 때였다. 선유도공원을 만난 것은.
양화대교를 건너다 우연히 찾아들어가게 된 공원이었다. 한강 한가운데 공원이라니. 아무도 없는 늦은 밤 녹색기둥 정원 위 긴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양 옆으로 도열해 있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 내 시야와 생각의 끈을 잡아끌었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모든 시간이 정지했고, 그 순간 나 자신과 순수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때의 공간이 나에게 주었던 보이지 않는 힘이 무엇이었을까 한동안 생각했다. 그저 밤의 대지의 힘이라 치부했다.
‘선유도공원’을 찾아보았다. 폐정수장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콘셉트는 그 당시에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경제개발도상 국가가 가지고 있었던 절대선絶對善(무조건 부시고 새로 만든다)에서 벗어난 발상의 전환에 마음껏 갈채를 보냈다. 완전히 버려진 곳에 뿌려진 생명의 씨앗들. 정수장 특성상 상당히 입체적인 공간 활용이 돋보였다. 구석구석 의도하지 않아도 재미있는 공간들이 만들어졌다. 그저 평면에 만들어진 일반 공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 녹색기둥의 정원. 지붕 없는 지하공간, 정수장 기둥을 그대로 지지대삼아 나무를 심어 녹색기둥을 만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각형 공간에 녹색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사방으로 서있다. 감탄이 나오게 아름다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공원이라니. 수시로 드나들었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프로젝트를 맡아 처음 폐정수장을 찾았을 때의 느낌을 말하고 있었다. '가장 맘에 드는 공간이다. 현재의 모습을 최대한 살리자.'
영화는 그녀가 만들어 놓은 수십 곳의 정원을 사계절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쯤 곰배령 산장이 나왔다. 여기서 다시 곰배령을 만날 줄이야. 그 시절 우연히 지인을 따라갔던 점봉산 곰배령(강원도 인제군) 탐방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야생화 군락. 하늘의 별들이 땅에 내려와 박혀 반짝이는 장관을 보게 되었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은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섰던 길에 만났던 땅 위의 별들은 마음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 깊숙이 들어왔었다. 가슴속에서 그 별들이 조금씩 빛을 내며 자라고 있는 것을 느끼며 깊은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녀의 조경 철학을 소개하는 장면으로 곰배령 숲 속에서 자연을 음미하고 흠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곳의 있는 그대로의 돌 하나 풀 한 포기가 그녀가 추구하는 조경 미학의 교과서라는 그녀의 설명이 더해진다. 결국 정영선이 땅에 써놓은 자연의 시들이 나의 어두운 시절을 관통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가 지켜놓은 자연의 힘에 치유당한 것이다.
용산 국립박물관의 정원에서 만나는 한국식 정원. 매주 드나들면서도 여기에도 그녀의 손길이 미쳤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늘 약간 빈약한 듯한 정원의 모습을 보며 박물관 건물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나였다. 나서지 않고 오롯이 여백처럼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오르는 중앙계단 우측으로 '거울못'이 있고 좌측으로 대나무로 둘러싸인 오솔길이 있다. 절에서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하여 불도의 세계로 들어가듯 이 대나무 길을 통과하여 박물관의 유물들을 만나러 간다. 속세와는 잠시 단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단보다는 그 길을 택하여 걷는다.
남양 성모성지 조경공사 현장. 성당으로 이르는 양 옆으로 조성되고 있는 십자가의 길.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부님과 조경가와 현장 작업자들과의 이견 조율의 현장. 제법 심각해 보이는 장면들. 그 무질서 후의 완성된 공간을 보러 가야겠다.
또 하나의 재미있었던 현장. 성수동 디올 매장의 중정 공사였다. 그곳에 다양한 한국의 야생화를 심고 있었다. 피는 시기와 색깔을 다 고려하여 한 부분 씩 세심하게 꽃을 심고 있었다. 어수선하고 다급한 분위기. 그녀의 말. 프랑스 정원 속의 한국 정원이란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렸듯이 그녀의 마지막 목표는 전 국토를 아우르는 조경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란다. 무분별한 서양식 정원이 아니라 우리의 정원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비루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인공을 거부한 중용의 미학. 영화 중간에 나오는 이 문구가 그녀의 조경 미학의 핵심인 듯하다. 전 국토에 그녀의 시가 그려지기를 기대한다. 가는 곳마다 그 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