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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Jun 12. 2024

아버지는 얼리 어답터

‘아빠가 사가도 혼나지 않는 과일가게’

동네 과일가게에 재미있는 문구가 붙어 있다. 과일 고를 줄 모르는 남편들이 사가도 품질을 보장한다는 나름의 자부심이다. 아버지도 이런 가게 주인들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저녁마다 무엇이든 꼭 손에 들고 귀가했다. 주로 과일 종류였다. 그러나 그 과일들은 하나같이 팔다 남은 찌꺼기여서 시들고 크기도 작았다. 어린 눈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사과는 쭈굴쭈굴하고 참외는 곯아 있었다. 그러나 과일이 아니라 엄마가 더 문제였다. 이런 걸 사 왔냐, 얼마 주었냐며 아버지를 닦달해 대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그렇게 지청구를 당하면서 화 한번 내지 않았다(결혼하고 나서야 남자들이 화도 내고 잘 삐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았았다). 다시는 안 사 올 법도 한데 번번이 저녁 장사의 떨이를 도맡아 해 주었다. 사 오지 말라는 엄마의 당부에도 한결같이 사가지고 왔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 어김없이 또 사들고 왔다. 소시지, 커피 등이 기억에 남아있다. 새로운 물건이나 음식들은 늘 온 가족이 함께 체험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우리들은 호기심이 발동했고 그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에도 매번 즐거운 순간으로 남아있다. 얼리 어답터로서의 모험을 같이 즐겼다.

지금도 안방에 모여 머리를 디밀고 분홍소시지를 자르는 광경을 지켜보던 순간이, 맛보고는 속이 올라와 간신히 삼켰던 그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다. 도마에 썰어놓고 온 식구(부모와 두 남동생, 나)가 둘러앉아 맛을 보았다. 다들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비위 상해하였다. 나중에 기름에 구워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없어서 못 먹었지만. 일단 한번 식구들에게 맛을 보인다는 생각 때문에 먹는 방법 따위는 신경 쓰지도 못한 것이다. 지금도 그리운 분홍소시지의 맛이다.

커피는 커다란 대접에 하나 가득 타고 돌아가며 맛을 보았는데 먹어본 적 없는 사약 같았다. 설탕을 듬뿍 넣고서야 먹을 만했다. 커피를 사발에 타서 나누어 마시던 대청마루도 기억난다. 그 공간에 풍기던 쓰지만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향이 기억난다. 지금도 커피는 마시는 공간이 중요하다. 커피 향이 풍기는 넓고 쾌적한 곳은 항상 좋다.

아버지는 평생 커피를 좋아했다.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입맛을 잃어도 커피는 끝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부모님을 만나러 갈 때는 반드시 캔커피 하나를 챙긴다. 일체의 음식물을 허용하지 않는 호국원의 방침 때문에 캔커피 하나만 뚜껑을 따두었다가 마시며 내려온다.       


아버지는 교육열이 엄청났다. 요즘의 부모처럼 여러 가지 것들을 다양하게 배우고 익히게 하였다. 삼 남매가 나란히 주산학원도 다니고, 겨울엔 방학 내내 스케이트를 타느라 얼굴이 여름보다 더 탔다. 얼음에 반사된 햇빛에 다들 얼굴이 구릿빛이 되었다. 당시 중량교 다리 밑은 거대한 야외 스케이트장이었다. 정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하수도 때문에 에는 쿰쿰한 냄새가 겨우내 배어 있었다.

피아노 레슨도 받았다. 노년에 다시 피아노 레슨을 받는 중이다. 남아있는 시간들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책을 한 권 사주었다.  시간이동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이과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책이 다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좋아하게 되고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다. 친구들 집에 있는 모든 책들, 모든 전집을 다 읽었다. 밥상 앞에서 책을 보다가 여러 차례 혼나기도 하였다. 초등 시절에는 50권짜리 세계명작동화, 그 이후로 한국 단편, 중편, 장편전집, 세계고전문학전집 등등. 그 당시에는 50권, 100권짜리 전집이 유행이었다. 자라서는 문학소녀가 되어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적성을 무시하고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외식을 하고 영화구경을 시켜주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청량리 로터리에 있었던 ‘영양사’에서 먹었던 불고기의 그 달콤하고 황홀한 맛과 냄새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불고기 판 위의 고기와, 가장자리 홈으로 흘러내린 국물을 밥에 넣고 말아먹으면 그냥 온몸이 녹아내렸다. 요즘은 그런 불고기판도 구경하기가 어렵지만 혹 만나더라도 그 맛은 아니다. 아득하게  깊고 넓은 홀에는 손님들과, 고기 익어가는 냄새와 연기가 가득했다. 어른이 되어 그곳을 지나다 보면 그곳이 이렇게 작았나 싶다. 기억도 시간만큼이나 아득히 멀다. 어릴 때의 공간에 대한 기억은 시간의 거리만큼 왜곡되어 있어서 종종 당혹감을 느낀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같은 건물 이층에 있었던 ‘동일극장’으로 올라가 영화를 보았다. ‘파브르 곤충기’, ‘돌아온 외팔이’.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  제목들이다. 덕분에 평생 영화 보기를 즐기게 되었다. 주말마다 TV에서 ‘명화극장’을 아버지와 함께 보았다.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자전거 도둑’이다.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아버지와 어린 소년의 담담한 표정이 뇌리에 박혀있다. 한 번은 아버지와 함께 ‘닥터지바고’를 보러 갔다가 매진이어서 보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나중에는 TV에서 아주 여러 번 보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영화를 왜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시대를 앞서 갔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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