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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Jul 11. 2024

산책길 메모

1

늦봄 저녁, 비 소강상태.

구름이 내려앉은 어둑한 하늘

서글픔이 내려온다.

짙은 풀내음과 아찔한 꽃향기. 쥐똥나무의 꽃이 지고 나서야 이름을 알았다

코끝을 지나 뇌 속 깊이,

폐부를 지나 영혼까지 도달하는 향기.

늦봄을 지나는 나를 온통 뒤흔들었다.     


산책길 고양이들은 어느 구석으로 찾아들었을까

다시 비가 흩뿌린다.

아직은 투명하게 빛나는 나뭇잎.

서너 마리 새들이 이리저리 장난치며 낮게 난다.

비가 지나간 나무들은 빗물 떨구며 흔들린다.

바람이 몹시도 심하다.

메타세쿼이아 새순들이 잎으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내려앉았다    

 

시냇물 한가운데 연꽃 한송이

이제 초여름이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사람들이 뜸한 산책길 곳곳은 비둘기들의 놀이터.     

비와 바람사이로 농밀한 커피의 향기

무분별한, 습관적인 카페출입을 자제하기로 했는데

카페 야외 테이블이 발목을 잡는다.      


어두운 저녁

산책길 벤치 위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등 돌리고 앉아있다

생존의 잔인함에 가슴이 미어진다.     


     



2

새벽부터 비틀비틀 술 먹은 중놈이 된다.

산책길, 보도블록 사이사이 흙을 뚫고 나온 지렁이와 개미들을 피하느라.

보도블록에는 지렁이의 사체가 즐비하고

개미들이 드나든 자리에는 조그만 모래 구멍들이 줄지어 있다.

할머니 따라 나온 어린 소년이 지렁이 한 마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인간들의 발에 짓밟힐 운명을 알고나 있을까.

공중에서는 나뭇가지 이리저리 까치들의 살벌한 싸움.

그들의 생존의 현장으로 인간들이 뛰어든다.     


버찌가 땅에 떨어질 무렵

찬란했던 기쁨들이 땅에 짓이겨 있다.

나뭇잎들은 더 이상 투명한 빛을 통과시키지 못한다.

바람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던 은빛물결을 포기하고 한껏 두꺼워진 잎사귀들은 무더운 계절, 녹음을 향할 준비를 한다.

봄이 완전히 갔음을 알려준다

여름을 맞이하고 더위를 견딜 몸과 마음의 무장을 한다.

털 달린 동물들이 힘겨운 계절.   


조그만 물고기들은 은빛 비늘 반짝이며 물 위로 튀어 오른다

눈앞에서 오리 한 마리가 힘차면서도 우아하게 물로 내려앉는다.

멀리서 까치 한 마리가 놀고 있다

경쾌한 걸음걸이로.     

라일락 잎사귀

나비 날개처럼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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