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
새벽공기가 가을맛이 들었는지 제법 날이 섰다.
숫돌에 벼려진 칼날이 되어 팔월 그 뜨겁던 태양에도 거침없이 달려들던 푸른 나뭇잎을 한잎 두잎 잘라낸다.
아야소리한번 내지 못하고 뎅그렁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간다.
기세 좋게 올라가던 하얀 벼꽃은 피워대기가 무섭게 가을볕에 시름시름 줄기부터 늙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가을은 마지막 은덕이라도 베풀듯 산마다 푸른 나무에 색동옷을 입혀 푸른 하늘의 하얀 구름과 어울리는 그림을 선물한다.
실버타운에 들어온 지 두 해가 되어간다.
첫해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처럼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다. 고작 하는 것이라곤 주변의 산책길을 알아두는 것, 그리고 새벽마다 걷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익숙하지 않아 발목에, 무릎에, 고장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담양 소쇄원 놀러 갔다가 숨어있던 그 옛날 양반들의 헛기침에 놀랐는지, 아내는 발목 골절이란 선물까지 안겨주었다.
배달료 2000원도 아끼고 아내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면서 식당에서 밥을 날랐다.
청소하랴 빨래하랴 티도 안 나는 일들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숨이 찰 지경이었다.
석 달 여를 아내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아내가 하는 일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자가 부른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계단을 오르거나 언덕을 내려갈 때 아내의 손부터 잡는다.
덕분에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우리에게 잉꼬부부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다.
두 번째 오는 가을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산책길 어디에 대추나무가 있고 감나무며 밤나무의 위치도 알려주었다.
양고살재 오르기 전 힐링카운티 왼편엔 밤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한그루에는 굵고 실한 알밤이, 하나는 쥐밤처럼 알이 작다.
배수장 근처에도, 미소사 오르는 언덕에도, 밤나무는 알밤을 툭툭 떨구어 나를 반겨주었다.
알밤을 주울 때면 웃음이 밤송이처럼 벌어진다.
한알 두 알 줍다 보면 시간은 어린 시절로 끌고 간다.
숟가락 들고 빤히 쳐다보는 눈들은 많은데, 그 눈에 웃음을 담아 줄 양식은 모자라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가을을 누구보다 기다렸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우리 논도 아닌데도 하얀 쌀밥이 눈에 아른거려 좋았다.
주먹처럼 매달린 감도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도 군침을 돋우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아직은 감이며 밤이 가을옷을 입기 전, 난 밤새 천둥 치며 바람 부는 꿈을 꾸었다.
그래야 떫은 감이며 풋밤이 가지째 부러져 떨어질 터이니 말이다.
새벽이면 기역자 군용 전등을 들고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있을,
얼굴 하얀 용원이네 감나무밭으로 달려갔다. 땡감을 주어 쌀뜨물에 담가 떫은맛을 삭힌다.
삼사일을 족히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
그 시간은 일각이 여삼추처럼 더디갔다.
건져낸 감은 찬물에 헹궈 먹는데 아삭한 식감은 껍질채 먹어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보다 더 맛있었다.
집 앞의 밤나무엔 새벽마다 인사를 다닌다.
알밤을 용돈 주듯 내려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었다.
알밤을 발견하면 먼저 눈이 반짝 빛나고 벌어진 입꼬리는 귀에 걸린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엔도르핀과 아드렐린이 동시에 터지는 기 현상이 발생한다.
누가 볼세라 얼른 주머니에 넣는데 입안은 침이 말라 버석거린다.
그렇게 주머니 가득 알밤이 채워지면 정복자 칭기즈칸이 된 듯 의기가 양양이다.
오늘도 새벽 산책에 나선다.
안개가 고창읍을 에워싸며 마지막 전투에 안간힘을 쏟지만 공격하며 진군하는 아침햇살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어느새 천지는 환한 아침이 점령한다.
알밤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날이 밝았다.
난 미소사 가는 언덕으로 올라가 알밤을 찾는다.
어제 낮에 누가 다녀갔는지 빈 밤송이 몇 개가 누워있다.
레이저 눈빛으로 밤을 찾는데, 영롱한 밤 한 톨이 낙엽사이에 반쯤 몸을 가리고 숨어있다.
요놈하고 잡아서 후하고 입김으로 샤워시킨 후 주머니에 넣는다.
석정온천 뒤편엔 밤나무 군락이 있다.
가지마다 터진 밤송이 밑에는 알밤이 떨어져 있다.
손을 재촉하여 줍는다.
어느덧 재킷 양쪽 주머니에 밤이 가득이다.
파크골프장 못 미쳐 키 작은 밤나무 한그루엔 풋밤 예닐곱 송이가 가을볕에 발발 떨고 있다.
며칠 후면 내 주머니에 들어올 테니 말이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천천히 내려올 때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개선장군처럼 집에 돌아와 식탁 위에 우르르 알밤을 쏟아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의 한마디 "으이그 다람쥐 먹게 놔두지 그걸 뺐어오냐?"
그 목소리에 오십 년 추억이 와장창 깨지고 난 눈화살을 쏘아대었다.
그것도 모자라 있는 대로 눈을 흘겨 째려보면서 말이다.
어휴 저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