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오월 햇살에도 연주홍 철쭉은 겁이 없다. 습자지에 색을 입힌 듯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찢긴 것 같다. 비라도 뿌리면 구멍이 숭숭 뚫릴 법도 하지만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처럼 도도하다. 오월의 들판엔 춤바람 난 꽃들이 연신 몸을 흔든다.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파란 하늘을 유영하는 새들과 구름 한 점까지 오월을 그리는 물감이다. 대지를 온통 초록으로 물들인 오월을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 하는가 보다. 잉태를 위한 몸부림 같은 오월은 그래서 화려한 꽃들을 연신 피워댄다. 기다란 줄기 위에 종이를 오려낸 듯 펼쳐진 농익은 꽃양귀비는 전라로 서있지만 부끄러움이 없다. 연분홍 저고리에 숨겼던 노란 꽃술의 작약은 숨을 멈추게 한다.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오월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다. 그렇게 밤마다 수를 놓는 조물주의 밤샘작업은 상그럽기가 그지없다.
송진냄새 그윽한 서실의 묵향은 코로 들어가 폐포를 눌러 번뇌를 진정시킨다. 호흡을 가다듬고 송연먹 가득 품은 붓과 물레 먹인 모시옷 같은 종이는 모래판이 된다. 거친 숨소리는 장사들 씨름에 투둑 하고 샅바 터지는 소리와 같다. 한 획 한 획에 구슬 같은 땀이 이마에 열린다. “ 그러니께 붓글씨는 모래톱에 통나무를 끌고 가듯 써야 힘 있는 글씨가 되는 거여” “ 아니 고것이 아니고 역입을 했으면 그대로 내려와서 면을 바꿔야 되는 거여 옳지 그렇게” 선생님의 목소리가 부드러움과 엄하고 단호함이 바람이 되어 날아온 화살같이 인중에 박히는듯하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더부룩한 속을 달래려 병원을 찾았더니 음식 삭히는 담즙 나르는 길을 못된 것이 막아섰단다. 칠십여 년을 달려온 길 수많은 가로막힘이 있었지만 손으로 밀치고 소리치고 뚫었던 길이 아니던가? 고작 작은 관을 막아선 모래알 같은 것이 암벽이 되어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다니.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같이 달려온 길, 편린이 된 추억이 바람에 흩어지고 포개진 설움이 켜켜이 쌓여 물 한 방울 내놓지 못했으리라. 병원에서 돌아와 “난 괜찮아” 하던 목소리가 이명이 되어 울린다.
타고난 음색으로 권유받은 성악가의 길은 그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는 소아마비로 인해, 오래 서있으면 밀려오는 다리통증에 그만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 기타의 선율에 희망을 띄워 보내고 탁구며 당구며 활시위 둥글게 당기는 국궁까지 못할 게 없었다. 화룡점정 같은 서예는 외롭고 지친 길에 감로수였으며 원두막 낮잠에 목침이 되었다. 토요일이면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여인숙에서 쪽잠 자며 서울선생에게 사사한 글씨는 힘줄이 울뚝불뚝 솟아나는듯하고, 대나무 중간에 내려진 예리한 칼날이 된 듯 힘찼다. 산하를 뒤흔들 범의 포효가 우렁차고, 수십 리 물속을 튀어 오른 용의 강인함이 종이를 찢을 듯 박력 있다. 군산으로 전주로 도시락 행진은 계속되었고, 먹물로 음영의 조화를 이루는 문인화는 난초로 대나무로 환생하여 보는 이의 탄성을 막지 못했다. 작품의 주인공을 표시하는 낙관, 서예의 꽃이라 하는 전각까지 섭렵한 구도자 같은 그의 삶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2021년 편하지 않은 몸으로 장애인 문화대상을 수상하는 업적을 이루고 받은 상금 전액을 기부하기에 이른다. 실낱같은 아버지의 삶을 조금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애련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암벽과의 싸움. 마침내 한 줌의 재가되어 그를 막아섰던 높은 암벽을 바람 타고 넘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그리움이 붙잡는다. 설움이 합세하면 꼼짝을 못 한다. 울먹이며 집 앞에 도착하면 연자색 달맞이꽃이 주인 잃은 서글픔을 토해내듯 피어있다. 담장 한편에 무리 지어 인사하듯 도열한 달맞이꽃. 어서 오라는 듯 저녁바람에 손을 흔든다. 동자승의 맑은 얼굴 같은 달맞이꽃. 유월의 언덕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달맞이꽃. 올해도 줄기 가득 피어나리라. 꽃 속에 파안대소가 펼쳐지고” 봉천 왔어?” 맑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리라. 먼 길 여행 어디쯤에서 바람 되어 달맞이꽃 흔들어 주시려나 오늘따라 석양이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