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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elJuliet Jan 29. 2024

2023년의 영화 Recap

<애스터로이드 시티>부터 <서울의 봄>까지

코로나의 마수를 이제야 완전히 벗은 극장은 고소한 팝콘 냄새로 가득 찼으나 역설적으로 근래 들어 가장 극장과 내외했던 한 해였다. VIP 혜택으로 값싸게 영화를 보는 일이 대부분이기에 높아진 가격의 탓도 아니었고, 시리즈물을 좋아하지 않기에 OTT-극장으로 양극화되어 가는 산업의 지형도에서 전자의 경쟁우위를 인정했던 탓도 아니었다. 다만 몸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올해는 어른이 되어서도 서점에, 공연장에, 무엇보다 극장에 바지런히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이 배가된 한 해였다. 생각건대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간으로서 기능하지만은 않는다. 다시 말해 내게 극장은 거대한 스크린, 빵빵한 음향 장치, 안락한 의자, 팝콘과 탄산음료, 함께 보는 가족 혹은 연인의 총합 이상의 무엇이다. 이것이 '영혼 보내기'까지 해가며 올해도 CGV RVIP를 유지해야만 했던 나에 대한 일종의 변호다.


각설하고 올해의 유난한 불성실로 인해 수많은 영화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영화라면 <메모리아>, <타르>, <이니셰린의 밴시>, <어파이어>, <어떤 영웅>, <스즈메의 문단속>,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한국 영화라면 <너와 나>, <괴인>, <우리의 하루> 정도가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생각건대 끝이 아닐 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해의 영화를 줄 세운다는 것은 실로 오만하고도 무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부득이하게도 (어떠한 의미에서든) 기억에 짙게 남은 영화들을 나열하며 몇 자 덧붙이는 잡문으로 올해의 극장 생활을 돌아보려 한다. 우습게도 '결산'이라는 단어의 맛이 지나치게 거창하기에 (실제로는 뜻이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그놈의 맛을 빼려) 'Recap'으로 갈음했음을 고백하며 글을 시작한다. 


2023년의 말미에 시작했으나 타고난 게으름으로 해를 넘겨 1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글을 올린다.





웨스 앤더슨, <애스터로이드 시티>


줄 세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단 한 문단만에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면서라도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올해의 영화라 말하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 상기한 이유로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2023년의 영화라 칭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따르나, 내가 관람한 2023년 국내 개봉작 중 최고였다는 정도쯤은 단언할 수 있겠다. 보편적으로 그의 최고작이라 여겨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뛰어넘었다. 다시 말해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내게 웨스 앤더슨의 최고작임에는 틀림이 없고 당장 생각했을 때 최애작이기까지 하다. 본작 이전까지 웨스 앤더슨의 세계를 머릿속에서 떠올릴 때 가져왔던 '(으레 그와 비교되곤 하는) 데이빗 핀처, 폴 토머스 앤더슨, 쿠엔틴 타란티노만큼의 개쩌는 작품을 만든 적은 없지.' 식의 오만한 생각이 단번에 뒤집힐 만큼 훌륭했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기점으로 웨스 앤더슨의 세계는 하나의 과도기적 전환을 맞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를 기점으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세계에 찾아온 변화와는 다른 맥락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동일한 테마를 다른 스타일과 형식으로 다뤘다면, 웨스 앤더슨은 예의 변태 같은 형식미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로 삶(현실)과 예술의 관계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프렌치 디스패치>가 일종의 과도기적 작품이었다면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통해 그가 나아간 새로운 세계에 기어이 방점을 찍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예술가로서의 영화감독이 예술로서의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드러난 영화가 근래 들어 있었던가.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성취는 무엇보다 웨스 앤더슨이 본작을, 그리고 예술이 탄생하는 일련의 과정을 결코 쓸데없이 무겁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는 공간감의 형성이라는 제일목적이 탈각된 대단히 요상한 롱테이크를 사용하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직설법을 사용하면서까지 (극중극중극으로 제시되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낸 각고의 노력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웨스 앤더슨은 이런 구조 놀음을 하는 영화라면 으레 가질 법한 현실과의 관계 맺기에의 욕구를 잘 참아낸 셈이다. 현실과 예술의 불가분성을 현실의 레이어를 빌리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실로 특출난 재능이다. 지난하게도 반복된 화합과 치유의 이야기를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넓게 펼쳐내는 감독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가장 가까이 자리한 영화를 꼽는다면 차라리 <드라이브 마이 카>다. 물론 <애스터로이드 시티> 쪽이 내게는 더 훌륭하게 느껴진다. 박유림의 수어도 퍽 감동적이었지만 인생을 덜 살아서 그런지, 구조 놀음에 어쩔 수 없이 매료되어 버린 것인지, 제이슨 슈워츠만과 마고 로비가 눈을 맞으며 대화하는 장면을 이길 도리가 없다. 올해의 영화, 올해의 장면.

 




마틴 스코세이지, <플라워 킬링 문>


제목을 그대로 음차할 것이었다면 도대체 왜 <킬러스 오브 플라워 문>이라는 제목의 뜻을 망쳐야 했냐는 의문은 잠시 접어두자. <플라워 킬링 문> 또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존재로 인해 '올해의 영화'라 칭할 수 없어 아쉬울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택시 드라이버>나 <성난 황소> 등 스코세이지의 대표작들을 그렇게까지는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플라워 킬링 문>에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전성기 대표작들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그의 21세기 영화를 구태여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올해는 스코세이지와 조금 더 가까워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스코세이지는 명명백백히 아메리칸 시네마의 기수(手)다. 이는 그가 미국 국적의 영화감독 중 가장 유명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한 맥락이었다면 스필버그나 타란티노의 이름이 스코세이지의 앞에 와야 한다. 그럼에도 스코세이지를 기수로 호명한 것은 스코세이지의 영화는 (스필버그, 타란티노 등의 영화와 달리) 미국이 아니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코세이지의 성취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빚지고 있으며, 그를 두고 가장 미국적인 영화감독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렇기에 스코세이지가 자신의 휘황찬란한 커리어를 끝맺는 지점에 이르러 <플라워 킬링 문>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뜻깊다. 3시간 20분을 실화 기반의 영화로서 그러나 현실과 얼마간 유리된 채로 존재하던 <플라워 킬링 문>은 마지막 6분 동안 스코세이지가 직접 등장함으로써 완성된다. 이것은 <택시 드라이버> 등에서의 카메오 출연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스코세이지는 자신의 노구를 스크린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플라워 킬링 문>과 현실을 이어, 1920년대의 수치로부터 2020년대의 미국은 얼마나 멀리 왔냐고 질문한다. 부끄러움마저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 읊조리는 스코세이지의 주름살이 곧 미국(영화)의 역사다.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편 스코세이지보다도 한 살이 많은 하야오 또한 걸출한 영화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물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하야오의 최고작이라 말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좋게 말하면 커리어의 집대성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열화판이다. 그러나 그 어떤 하야오의 구작보다 많은 레이어를 겹쳐놓고 많은 세계를 탐험하게끔 하는 본작을 하야오가 만든 가장 내밀하면서도 가장 환상적인 영화라 말하고 싶어진다. 예상컨대 원숙함이 아닌 순수함으로 승부하는 백발 노인은 전 세계에 미야자키 하야오 하나뿐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야오를, 지브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다. 


하야오가 뛰어난 비주얼 아티스트인 동시에 끝내주는 각본가임은 자명하지만, 무엇보다 하야오의 고유한 능력이라 하면 어디에서도 목도한 적 없는 세계를 관객의 보편적 취향에 설득시키는 능력이겠다. 그 분야에서라면 하야오가 세계 제일이다. 따라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두고 역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이라 일컫는 것은 외려 그에 대한 과소평가다. 하야오에게는 그보다 역대 최고의 판타지 영화감독이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수많은 세계에 수많은 이야기가 기묘하게 중첩된 본작을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본작을 둘러싼 소위 난해함 논란이 안타깝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물론 이동진 평론가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없다만 그가 파이아키아와 함께 대중의 전면에 돌아온 이후 영화가 해석의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영화는 암호도 퍼즐도 도식도 아니다. 다시 말해 기괴한 생김새의 왜가리 캐릭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본작이 하야오의 개인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일본의 군국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는지 따위만을 좇다 보면 결국에 판타지 영화라는 본질에서 미끄러지고야 만다. 해석의 필요성이 노잼의 변호 수단으로써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자명한 진리라지만 재미가 없음에도 구태여 알아가면서까지 재미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일에 시간을 쏟기에 세상에 재미있는 영화는 널리고 널렸다. 본작에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면 '해석을 모르면 재미없는 영화'라는 식으로 속단하지 말고 그저 재미없다고 말하면 될 일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하야오의 은퇴작이 아니며, 하야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 출근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물 건너 이스트우드 옹처럼 하야오 영감님도 오래오래 영화를 만들어달라 바라는 수밖에.





크리스토퍼 놀란, <오펜하이머> & 샬롯 웰스, <애프터썬>


지금까지의 세 편이 2023년의 TOP 3라 갈무리하더라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외하면 압도적인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나, (일종의 특권의식을 부여하는 것 같아 사용하기가 꺼려지는 단어이나) 소위 '시네필'을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 올 한 해 상기한 세 편보다도 많이 회자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원숙해진 놀란의 <오펜하이머>와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의 태가 나는 <애프터썬>이다. 두 편의 대중적 인지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지만 평단과 관객 양측 모두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 두 편을 앞설 영화는 없다.


역시 <오펜하이머>와 <애프터썬>이 잘 만든 영화임을 부정할 방법은 없으나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 깊은 감흥을 얻지는 못했다. 두 편을 보고 나면 꽤나 지적인 영화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는 <오펜하이머>와 <애프터썬>이 플롯에 의존한다기보다는 플롯과 형식 사이의 긴장 내지는 조응으로서 유지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핵융합과 핵분열 반응의 도식을 주인공의 인생과 교묘히 겹쳐 놓았으며, <애프터썬>은 기억의 온전한 재현 불가능성을 플래시백에 영리하게 이용하여 (좋은 의미에서) 거의 관객을 가지고 놀다시피 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와 <애프터썬>의 형식과 플롯이 완벽하게 조응하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형식에 대한 강박이 작품 전체보다 앞선다고 느껴지는 탓이다. 두 작품의 고유한 형식이 반짝반짝 빛나는 예술적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절대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적어도 나를 감각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특별한 순간에 데려다 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형식 편에 과하게 실린 무게추가 크리스토퍼 놀란과 샬롯 웰즈로 하여금 다른 중요한 요소(<오펜하이머>의 경우 후반부의 연출적 긴장감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오펜하이머의 내면 묘사, <애프터썬>의 경우 개별 쇼트의 운동성)를 놓치게끔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을 뿐이었다. 그들이 뛰어난 실력 내지는 잠재력의 연출자들임을 알기에 (혹은 처음으로 확인했기에) 더더욱.





스티븐 스필버그, <파벨만스> & 데미언 셔젤, <바빌론> & 김지운, <거미집>


영화에 대한 영화, 소위 '메타 영화'를 싫어하는 영화 애호가가 있을까? 만신전에 발을 들인 노장, 거장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려 하는 젊은 감독, 한국의 스타일리시한 중견 감독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뿍 드러내는 메타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산업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이 보이던, 극장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특권적인 의미가 뿌리부터 흔들리던 판데믹 상황이 지나고, 촬영과 감상의 행위를 주요하게 다루는 메타 영화가 대거 개봉했으며 인구에 회자되었음은 공교롭고 흥미롭다.


천양지차의 스타일과 이야기로 영화에 대한 러브레터를 써 내려가는 세 작품은 그러나 영화를 결코 곱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지점에서 공명한다. <파벨만스>에서 영화는 프로파간다이고, <바빌론>에서 영화는 배설이며, <거미집>에서 영화는 아수라장이다. 세 작품에서 영화는 무겁지도 고결하지도 고귀하지도 고상하지도 않게 그려진다. 어쩌면 세 연출자는 바이러스가 사람뿐만 아니라 산업마저 집어삼키려 했던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영화 산업의 유약함을 공통적으로 목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지막에 다다르면 영화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숨기지 못한 나머지 셋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러브레터를 작성한다. 모두 빼어나다고 할 수 있는 세 작품의 엔딩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부담스러울 정도로 넘쳐흐르는 셔젤의 야심이다. 이 정도면 그가 이야기를 끝맺는 데 특출난 재능을 가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누군가에게 자의식 과잉으로 비칠 수 있겠으나 급작스러운 몽타주로 70년의 세월을 거슬러 <사랑은 비를 타고>와 본작을 겹쳐놓는 시도는 감정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마무리였다. 다만 <바빌론>의 흥행 참패로 셔젤의 자의식이 현실과 지나치게 타협할까 걱정될 뿐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사랑은 낙엽을 타고>


메타 영화는 아니나 <사랑은 낙엽을 타고> 또한 극장을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운다. 처음으로 본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올해 관람한 가장 뛰어난 작품, 이른바 걸작이었냐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내게는 올해의 영화였음을 서두부터 선언한 마당에 말이다. 그러나 삼류 로맨틱 코미디 영화 같은 제목을 가진 (물론 원제의 의미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자면 <떨어지는 낙엽>이니 카우리스마키에게는 다소 가혹한 언사겠다만) 본작이 올해의 나와 올해의 세상에게 가장 필요했던 영화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가 그러했듯 극장을 일종의 도피처로 그려내는 본작은 그러나 끝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다른 길을 걷는다.


엔딩에서 강아지 이름을 언급하며 찰리 채플린에게 헌사를 바치는 장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21세기의 가장 피폐한 시기에 적절히 도착한 <모던 타임즈>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80분 내외의 짧은 러닝 타임을 가진 두 작품은 모두 웃음과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모던 타임즈>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을 활용하는 반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경우 지독히도 시니컬한 블랙 유머를 활용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의미로서 유머와 사랑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본작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콘텍스트를 플롯에 편입시킴으로써 동시대성을 획득하는 한편 (<모던 타임즈>의) 반복적인 삶을 지겹고 끔찍하고 짜증나는 종류의 것으로 그려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희망을 가질 수 있기에 삶이, 웃음과 사랑이, 무엇보다 이 영화의 도착이 더욱 뜻깊다. 





김성수, <서울의 봄> 그리고 2023년의 한국(영화)


이런 글을 쓸 때면 결국 '한국 영화'로 돌아와 한국인으로서 당년도의 한국 영화를 하나의 트렌드 내지는 관념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야릇한 욕구가 일곤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의 열렬한 팬이 아니기도 하거니와(이상하게도 문학과 영화라는 두 종류의 예술에 대해서만큼은 - 음악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 사대주의자가 되곤 한다) 서두에 썼듯 <너와 나>, <괴인>, <비밀의 언덕>을 모두 놓칠 정도로 유달리도 한국 독립영화와 멀어졌던 한 해였기에 상업영화 이외의 것을 이 글에서 감히 다루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2023년의 한국 상업영화는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내게는 일종의 맹탕처럼 느껴진다. (2020년대의 영화에 한하여 말하자면) <사냥의 시간>처럼 대중의 오해를 받아 변호하고 싶었던 작품도, <승리호>처럼 평단의 행태에 실망했던 작품도, <헤어질 결심>처럼 미학적 측면에서 당년도 해외의 걸작들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작품도, <비상선언>처럼 기괴한 방식으로 여론이 형성되었던 작품도 눈에 띄지 않았던 탓일 게다. 물론 <거미집>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꽤나 흥미로웠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워서 기존의 한국 상업영화와 궤를 달리했던 두 편은 그러나 뚝심을 끝까지 밀고 나가 고유의 온도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기에는 <거미집>의 흥행이 처참하긴 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영화가 지닌 디제시스의 외부에서 이야기를 덧붙이기란 어렵다. 그나마 김지운의 발언이 소소하게 논란을 불러왔던 정도겠다.


그렇다면 결국 <서울의 봄>이다. '영화'라는 단어를 산업의 측면에서 접근하든 예술의 측면에서 접근하든, 태평양 건너 미국의 <바비>가 그러하듯 2023년의 한국 영화를 논할 때 <서울의 봄>은 빼놓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름이다. 상기한 두 편이 온도로 관객을 사로잡았다면 <서울의 봄>은 시종일관 높디높은 습도를 유지함으로써 성공에 가닿은 영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울의 봄>의 대성공을 지켜보고 있자면 지금으로서 기이하다고 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의문에 도달하고야 만다 : <서울의 봄>은 어떻게 성공했으며 '서울의 봄'은 정말 도래했는가?


그러니까 <서울의 봄>은 본질적으로 <쉰들러 리스트>와도 다르고 <바스터즈>와도 다르다. 질적인 차이를 의미함이 아니다. <서울의 봄>에는 <쉰들러 리스트>의 고결한 승리와 <바스터즈>의 사디즘적 카타르시스 모두가 부재한다. <서울의 봄>은 전두광-전두환에 대한 단죄로서 소비되는 한편 관람하는 동안 애플워치의 스트레스 지수를 인증하는 '열받음 챌린지'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직관적으로 전자와 후자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서울의 봄>으로부터 대중문화의 마조히즘적 카타르시스라는 새로운 사회문화 현상을 짚어내야 하는 것일까? <남한산성>이 사디즘적 카타르시스의 부재로 인해 흥행에 실패했다는 주장이 참이라면 <서울의 봄>은 어째서 면책 조항의 적용을 받았을까? 지금으로서는 <서울의 봄>이 장르 영화로서의 쾌감을 충분히 제공했기에 성공했다는 무딘 결론밖에는 내릴 수가 없겠다.


그보다 중요한 의문은 '서울의 봄'이 정말 도래했냐는 것이다. 계엄당국의 무자비한 언론 통제로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지로부터 꼭 사십삼 년이 흘러 통제받지 않은 언론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故 이선균 배우의 안타까운 사망은 1980년과 2023년을 동질적인 프레임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데, 1980년이 겨울이었다면 2023년은 푹푹 찌는 여름이었나 보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그리고 한국 영화계가 가장 빛나는 재능을 잃었음에 탄식하게 된다.






이외에도 알리 압바시의 <성스러운 거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아리 애스터의 <보 이즈 어프레이드>,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 또한 굉장히 흥미로웠으나 감상이 제법 휘발된 탓에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지 못함이 아쉽다. 더 많은 좋은 영화를 더 소중하고 짙고 깊게 만날 수 있는 2024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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