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이 수시 열 군데를 쓰고 당연히 수시 납치를 당해 정시 수능시험을 보러 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우주상향 대학을 지원하고도 당연히 붙을 것이라는 자신감. 이제는 자만이었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온다.
2024년 11월 14일 수능일인 이틀 전 수시 발표가 띄엄띄엄 나는 상황에서도 어느 것 하나 합격이라는 알림을 받지 못함에 있어서 딸과 엄마인 나는 그다음 대학을 당연히 붙여줄 것이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좌절하지 않았다.
어떤 대학은 유재석, 신동엽이 재학했다는 그 대학이었는데 1차에 합격하여 2차까지 가서 시험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안되고 수능 이틀 전 마지막 두 개가 발표 나는 날에도 딸과 나는 초조하지 않았던 건 분명 자만이 맞다.
그날은 그래도 약간의 안절부절로 학교에 간 딸에게 내색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조금 빨리 가지 않을까 해서다.
오후 2시와 오후 5시 발표를 기다리며 커피만 마시다가 배고파질 때면 잉글리시머핀을 하나 더 주문해서 커피와 마셨다.
이건 뭔데 맛있는 거지?
맥도널드에서 파는 맥모닝도 먹어봤지만 별다방에서 파는 이것이 더 맛있는 이유는 패티 때문일까.?
쓰디쓴 커피가 구수한 보리차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두 조합을 음미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집에서 더 편하게 시간을 보내자 하며 돌아왔다.
집에선 마냥 시간 보내기가 더 힘들어 헬스장으로 달려갔다.
1분 1초도 가만히 못 있고 이리갔다저리갔다 홍길동 놀이에 빠진 사람처럼 돌아다닌다.
헬스장에서도 러닝머신 했다가 천국의 계단 했다가 자전거를 탔다가 도통 무엇하나 집중하지 못하고 바쁘게 운동에 빠진 사람처럼 다닌다.
오후 2시.
딸아이는 엄마가 먼저 합격 조회를 해 보지 말라고 했지만 수험표를 찍어둔 덕에 아무도 몰래 조회해 볼 수 있었다.
두근두근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망연자실
이제 마지막 한 개의 대학교 발표가 오후 5시에 나는 것이다.
사우나를 갔다가 탕 안에 들어가 명상을 해 보다가 뜨거운 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줄기를 느껴보다가 해도 시간이 이렇게 뎌디게 간 날은 내 인생 손꼽는 날 중에 하나였다.
그래도 이 마지막 한 개는 되겠지.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난 한동안 멍하니 한 곳 만을 내 눈동자를 내버려 둔 채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누군가를 탓했다가, 내 탓을 했다가, 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가.
우리 딸과 같은 과가 아니더라도 이 모든 수험생들이 겪었을 쓰라린 탈락의 아픔이다.
비싼 학원을 다니고 따로 개인래슨을 하고, 실기복을 사고, 머리를 어떤 식으로 해라.라고 하면 그에 따라 미용실에 가서 시간과 돈을 들여해 놔야 했다.
어떤 동작으로 연습을 하다 다치면 한의원에 다니고 정형외과에 다니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수시실기를 가는 날엔 아침부터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하고, 커피를 사고, 모르는 길을 내비게이션에 이끌려 달리고, 통행료를 내고 또 내고, 서울의 비싼 땅값을 자랑하듯 주차비를 값지게 내야 했다. 아이가 대기번호를 달고 입실하고 나서는 3시간이 넘는 시간을 야외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 모든 걸 11번 했다.
그런데 예비번호 받은 두 개의 대학 말고는 딱히 지금 너 붙었다 해주는 곳이 없다니.
하루아침에 수능을 봐야 하는 수험생이 되었다.
나는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해야 했다.
수능도시락통을 꺼내 세척해 둔다.
수험생시계를 준비해 둔다.
그리고 또 뭐가 없더라.. 아이한테 해줄 말도 없고.. 한숨만 연신 아이와 내가 번갈아 가며 해댔다.
“딸아, 너 왜 내일 수능 보러 가니?”
“그러게요..”
얼굴이 죽상이 되어 수능장으로 끌려가는 아이처럼 어깨가 축 늘어져있다.
“소시지랑 김치볶음을 반찬으로 쌀까 해.”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아무거나 해요.”
“그래…”
수능 전 날 아이를 일찍 재우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 3시에 잠에서 깼다.
‘아 맞다. 배냇저고리!’
이때 사용하려고 아기 때 입던 배냇저고리를 아이별로 한 개씩 버리지 않고 남겨뒀다.
배냇저고리에 달린 끈 두 개를 조심히 잘라 사탕을 포장하려고 사둔 봉투에 잘 넣어 담았다.
배냇저고리 끈만 담긴 것인데도 보들보들한 재질의 두줄의 끈은 그저 아기의 배를 가려주려는 매듭의 끈이 아닌 그 자체만으로도 안아주면 포근했던 아기가 떠오르게 한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아빠차를 타고 가다가 커피를 마셔야 긴장이 풀릴 것 같다 하여 까만 커피를 텀블러게 따뜻하게 준비했다.
아빠와 나가는 딸의 가방을 만져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떨지 말고, 잘하고 와. 그냥 시험지 마킹 잘하고 그냥 이따 끝나서 잘 나오면 돼. “
“고마워요 엄마.”
딸은 그렇게 우리의 예정에 없던 수능을 보러 떠났다.
요즘엔 고등학생들에게 휴대폰을 자유롭게 하는 추세라 언제든 딸에게 문자를 하면 답이 온다.
”딸, 그때 사두라고 했던 제품 이름이 뭐지? “
“아, 그거 ###브랜드예요”
하지만 지금은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서 한 문제라도 더 맞혀야 하는 수험생으로 책상에 기대어 열심히 문제를 푸는 고3이다.
딸이 오면 해주려고 나만의 힐링템을 준비했다.
우선 빵을 샀다. 쫄깃한 잉글리시머핀이라는 빵인데 정말 쫀득하고 식빵과 다르다.
잉글리시머핀 만드는 법 잉글리시머핀 1개 샌드위치 햄 1장 계란프라이 1개 체다치즈 1개
이 모든 걸 준비하면 바로 요리는 끝난다.
맥도널드에서 파는 이름은 맥모닝이고, 스타벅스에서 파는 같은 제품 이름은 블랙퍼스트 잉글리시머핀이다.
하지만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게 조금 더 맛있다.
소스가 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계란과 치즈의 촉촉함으로 소스를 대신한다.
그래서 칼로리가 적고 다른 햄버거와 샌드위치와는 다르게 건강한 맛이다.
모든 빵 종류가 그렇듯이 이건 커피와 먹었을 때가 제일 잘 맞는다.
내가 가끔 생각이 많을 때 이 잉글리시머핀과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에 간다.
무언가 힐링이 되고 생각이 정리하기에 나를 방해하지 않는 맛이다.
오늘 수능 끝나고 나온 딸에게 이걸 만들어 주려고 준비해 봤다.
딸과 나는 다시 수시때 했던 것처럼
대학교 접수를 하고, 날짜에 맞춰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커피를 사고, 내비게이션에 따라 길을 찾아 학교에 가고 아이를 3시간 넘게 기다리는 이 모든 걸 다시 해야 하지만 우리 딸과 용기를 내어 기회를 잡아보자 의기투합을 했다.
모든 수험생 부모님들과 수험생들은 각자가 결정한 대입 방식이 모두 다르다.
논술로 가는 학생, 최저를 맞춰야 하는 학생, 실기를 연습해서 가는 학생, 고등과정 3년 내내 성적으로 대학을 가는 학생.. 등등
어느 누구 하나 너는 편하게 준비하는구나..라는 건 없다. 어느 누구 하나 나만 정말 힘들었다도 없다.
모두가 전쟁터에서 살아남듯 열심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그런 실패였다.
하지만 지금의 실패가 앞으로 커 나갈 고3 아이들에게 꼭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은 분명하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