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뒤집으면 살자' 말고도 하지 말아야 하는 말들은 많다.
위기를 벗어난 지 두 달. 꽤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 중이다. 여전히 일 주일에 한 번 가야 하는 상담은 체력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힘들다. 그래도 누군가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정리하며 조언해 주는 것은 꽤 괜찮다고 느낀다.
워낙 오래도록 비슷한 패턴을 이어왔고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부모님은 병원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지, 약이 왜 줄어들지 않는지, 약을 줄여야 할 때가 아닌지, 예전보다 이야기하는 빈도가 더 잦아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약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약을 그만 먹을 때가 되지 않았냐' 혹은 '약을 꼭 먹어야 하느냐' 같은 투의 말은 참 속 편하고도 생각 없는 말로 다가온다. 더욱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단을 받은 경우, 외상을 입은 것이 아니고 얼핏 보면 병이 없는 일반인과 구분이 힘들기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환자 본인과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만이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을 앞세우며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리어 상처를 입히고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 고심하게 된다. 파고 파고 또 파고 들어가면, 아마도 '이제 다 나은 게 아닐까' 라는 기대감과,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됐는데' 라는 초조함, 어쩌면 '내 자식이 이럴 리 없어' 라는 부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고, '이제 다 나은 것 같은데, 이 생활이 너무 편해서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들이 나오지 않을까.
'집에만 있고, 누워 있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일하지 않는 이 상태가 어떻게 보면 편하잖아. 일반적인 삶과 다른 삶을 사는 거니까. 그래서 생각보다 네 상태는 괜찮은데 이 생활이 편하니까 안주해 있으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 잘 생각해봐.'
이런 말들은 결국 끊임없는 불안함을 부추길 뿐 그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
'루디 씨는 쉴 수가 없는 성격이예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살까,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하는 삶이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거든요. 생각이 너무 많아요. 쉬어도 되는데. 생각을 하는 시간을 정할 수 있을까요? 그 외의 시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나는 무언가 프리랜서로서 일은 하긴 했다) 뭘 했기는 했네.'
'루디 씨가 자꾸 불안해 하니까, 정말 부담 없는 사무직.. 정보 입력만 하면 되는 그런 간단한 아르바이트같은 것이라도 해 보는 건 어때요? (못 하겠다고 하자) 나중에 준비가 되면, 그런 데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 말고요. 마음의 근육이 다 키워지고 감당할 수 있으면 그 때 해요.'
누구보다 가장 치료 경과에 의심을 품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은 바로 상담 치료/약물 치료를 받는 환자이다. 약을 바로 먹는 사람들도 많이 없다. 나는 약을 받아 놓고서도 이걸 꼭 먹어야 하나 싶어 안 먹고 버티다, 이러다가 정말 죽겠다 싶어 먹기 시작했다. 물어보고 또 물어볼수록, 그리고 '네가 이런 이야기를 못 하게 하잖아' 라고 이야기할수록 환자는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나' 를 들여다보고 불안해한다. 그렇게 야기된 불안이 눈덩이처럼 커져 심각해지면 또 다시 바닥을 치게 되고, 또 상담을 받고, 또 약이 늘어가고. 무한 반복되는 것이다.
최근 내가 느낀 것은 진정한 나의 의지가 생기기 전까지 모든 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 우울해지고 신체적 증상이 나타난다 - 상담/약물 치료를 늘리고 변화를 준다 - 나아진다 -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 (반복)
치료가 긍정적으로 진행된다면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기 전 전조증상을 알아차리고 쿠션을 가득 깔아두는 방법을 배우거나, 혹은 자극을 받아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자극을 받아도 일상 생활에 별 타격을 입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그때서야 이 지긋지긋한 정신적 문제들로부터 한 발 떨어질 수 있게 된다.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가? 나의 경우에는 그럴 수 없었다. 의절할 수 없는 가족 같은 존재다.
이 뫼비우스의 띠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나아지는 것이 없고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트랙을 뛰쳐나갈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한데, 의지란 것은 원래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의지는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고, 그 때가 되면 댐이 터지듯 그동안 쌓고 막아온 온갖 감정들이 터져 아주 난장판이 된다.
이제 난 의지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 의지가 없다.
삶에 대한 의지도 없고 당장 하루 눈 뜨면 하루를 끝내기 위해 살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의지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루를 살면 죽는 하루살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루살이에게는 오늘밖에 없고, 미래라는 개념이 없다. 그 하루살이에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의지는 어디에도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다. 당장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없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무슨 수로 의지를 찾을까.
물론 선생님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꾸준히 권하고 있고, 그것을 '못 하겠다'며 부정하고 숨어들어가는 것은 나이다. 결국 나의 문제인 것이고, 내가 의지를 찾으면 되는 것인데 - 그걸 못 하겠으니. '싫다'가 아니라, '못 하겠다' 라고!
결국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고 또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