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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Nov 10. 2022

우리가 우리의 몸을 돌보지 않는 이유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다. 단순히 안 먹고 안 씻는 것을 떠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없다. 아니, 병이 그 의지를 없앤다. 


집, 그것도 방 안에서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는 채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씻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속옷도, 겉옷도 갈아입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침구에서 냄새가 나도 이것이 일상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냄새인지 아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기 전, 세수든 양치든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그냥 잠이 들어버린다. 도저히 일어나는 것조차 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몇 시간의 고민 끝에 미루어 버리거나, 씻어야 한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자고 일어나는 삶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삶이 이어진다. 습관이 좋지 않게 들면,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빨이 썩고 몸에는 때가 쌓이며, 생경한 통증에 오래간만에 찾은 병원에서는 상당한 돈을 지불하게 된다. 


나는 청소년기에 고립된 삶을 살았고 성인이 되어서야 사회에 나왔다. 스스로 세상에 나오길 선택했으나 오랜 시간 동안 교류할 만한 또래 집단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화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자연스러운 교류를 제외하고도 유투브 채널들이나 여러 글들을 찾아보며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것과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익혔다. 말 그대로 나의 사회화는 학습된 사회화인 것이다. 이 때 어렴풋이 보통 사람들은 언제 몸을 씻고 언제 머리를 감는지, 언제 침구나 옷을 빨며 갈아입고 교체하는지 등을 알았다. 다들 그것이 현대 위생 개념의 기본이기에 따르는 것이지, '굳이 왜?' 라는 의문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피부로 다가오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에게 다가오는 미래는 '없다'. 웃긴 농담이 하나 있다.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 아무것도 안 보여. / 맞아, 그게 너의 미래야.' 라는 농담인데,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래란 바로 이런 느낌이다. 죽고 싶다며 내내 울거나 자해를 하는 시기를 벗어나 감정의 파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 이르면, 죽음은 큰 마음 먹고 선택해야 하는 거대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함께할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당장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들로부터, 그것을 활용해 죽어 있는 나의 모습이 연상되어 필름처럼 뇌리에 박히는데 어떻게 내일을, 한 달 뒤를, 일 년 뒤를 생각하겠는가. 당장 하루 뒤의 내가, 한 달 뒤의 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건강 따위 챙겨봤자 부질없고 소용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찾은 병원에서 몇 년 동안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은 죗값을 호되게 치르고도, 스스로가 비위생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또 다시 몸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늘 모든 것보다 한 발 먼저 앞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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