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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Mar 07. 2023

죽음이 머릿속에서 통통 튀어다닌다면

죽음이 장난처럼 느껴지는 것은 생각보다 꽤 심각한 일이다


우울증 14년차. 초기에는 죽고 싶다며 혼자 상처도 많이 냈다. 그러다 아무 짝에도 소용 없다는 걸 알았다. 몇 년 뒤, 침대 속에 녹아들어갈 기세로 늘어져 있는 나에게 죽음은 다른 형태로 찾아왔다. 옷걸이에 목을 맨 내 모습이,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에 치여 날아가는 내 모습이, 공사 중인 크레인이 고장나 내 머리 위로 떨어져 깔리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담을 다시 시작하고 일 년 뒤, 이제는 길가의 간판을 보아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신기했다. 선생님, 공사 중인 곳을 보면 이젠 그냥 잘 피해가야겠다, 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사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구요.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지만 그것은 굉장한 발전이었다.



그리고 몇 달 전부터 죽음은 또 다른 형태로 날 찾아왔다. 마치 장난처럼, 어린아이들 놀이처럼. 마치 머릿속에 어울리지도 않는 광대가 하나 들어가 공중제비를 돌며 외치는 것처럼. 일상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번개처럼 스쳐지나가는 아주 가벼운 충동적인 생각으로. 커피를 마시다가, 대충 끼니를 때우다가,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가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들에 ”죽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죽을까?“ 는 너무나 가벼워서 한동안은 이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만큼의 무게를 지녔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정말 깃털처럼 가벼운 생각이라 잡아채기도 어려웠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 ”죽을까?“ 가 가진 가벼움은 너무나 섬뜩했다. 그 “죽을까?” 는 “지금 여기서, 저 스카프로 목을 매면 10분 뒤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사라질 수 있어.” “이런 충동이 들면 실행으로 옮기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는데.“ ”와, 30분 사이에 너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의 축약형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는 얼그레이 케이크야”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은 데이빗 보위야” “오늘 세 시간밖에 못 잤어” 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처럼 느껴졌다.어이가 없었다. 분명 죽는다는 건 엄청나게 큰 어려움을 동반하는 것인데, 이게 이렇게 쉽고 가볍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런 충동이 드는 순간 나는 정말 어디에 홀린 사람처럼 바로 일어나서 스카프를 찾거나 창문을 열어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매번, 죽음 뒤에 의식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나의 이성이 그것을 통제했다. 그래서 살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자살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죽을까? 이렇게 해서 죽으면 10분만에 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은 생각들이요.


최근 생긴 기이한 변화에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에 이것저것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증상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선생님에게도 그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냥  그게 내 생각이었고 너무 익숙해졌으니까. 지금처럼이 아니더라도 나는 늘 ‘죽고 싶다’ 를 마음 속에 새긴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있어 이건 조금 섬뜩한 변화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들’ 은 전부 이 상황을 좀 심각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렇긴 하지, 죽음을 가까이 여기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그냥 어린애 장난처럼 생각된다니까, 심각한 변화이긴 한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이 말을 더듬으며 나에게 잠깐만 이야기를 멈춰 달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며칠 전부터 하루에 영화를 세 편씩 보고 있다면서, 이런 영화를 봤고 저런 영화를 봤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중에서 어느 한 영화의 이야기를 했는데,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예술가의 가난한 시절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 속 예술가의 상황이 나와 비슷했기에 선생님은 ‘영화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나’ 같은 질문을 하셨고, 나는 정말 솔직하게 대답했다. 요즘은 숨겨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있는 힘껏, 내가 느낀 그대로 솔직하게.


“주인공 처지랑 저랑 비슷해서 공감도 갔는데, 그냥 부러웠어요. 일찍 죽었잖아요.”


그 때 선생님 표정은 정말 무슨 봐서는 안 될 뭔가를 본 표정이었다. 물론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였지만 나는 선생님의 감정이 그렇게 동요된 것을 몇 년 만에 처음 보았다. 그게 무슨, 무슨 말이예요. 또 이상한 말을 하고 있어요. 선생님은 노트북으로 시선을 올렸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이런 말 하면 안 되긴 하는데, 어디서 하겠어요. 그냥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을 수 있다는 게 부러웠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천재 예술가가 유의미한 업적을 쌓고 죽었다는 점이 인상깊었던 것이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아뇨, 그냥 죽었다는 게.. 자살도 아니고, 갑자기 요절한 거잖아요. 물론 아프긴 했겠지만.. 업적이 어땠든 상관 없어요. 그냥 일찍 죽을 수 있었다는 게 부러울 뿐이예요.”


말이 좀 이상하게 나오긴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나 죽고 싶어 안달이지만 죽지 못해 살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토해낼 열정이 저렇게나 많은데 각자의 사정으로 정말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아이러니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저런 사람들한테 내 수명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도 들고. 내가 죽지 못해 살고 있으니 저런 방식으로라도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부러워 보이기까지 한 것 같다. 모르겠다, 나도. 굉장히 논란이 될 만한 말이고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분의 유가족께는 전혀 들어가면 안 되는 말이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혹시… 혹시 지금 장난으로.. 선생님이 말을 더듬었다. 난 한두 달 전부터 선생님에게 ‘장난처럼 죽음을 주제로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라는 말을 해왔는데, 그런 말을 듣고 익숙해졌음에도 이번 발언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웃으면서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정말 웃으면서, 너무나 가볍게 말을 하고 있었다. ”제가 빵을 먹으려고 했는데, 우리 집 강아지가 제가 먹기도 전에 그걸 가져가서 다 먹어버린 거 있죠!“ 처럼, 무슨 일상 생활 중에 일어난 재미있는 일화를 말하는 것처럼. 너무 가볍고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다.


“장난 아니예요. 장난이 아닌데… 저 지금 너무 장난처럼 말했어요? 근데 진짜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진짜 무슨 장난처럼.. 너무 가볍게 생각돼요. 그런 것들이요.”


선생님은 ‘알고 있어요’ 라고 했다. 알고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한 번 의심해 보자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웃지 말아야 하는데, 정말 난 가벼운 마음이어서, 아무 의미가 없는 텅 빈 말이라 계속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생님은 잠깐만 시간을 좀 달라고, 정리를 좀 하겠다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가 빙빙 돌아버리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난 그 말을 선생님이 진정될 때까지 잠깐 동안 말을 걸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었고, 그게 맞았다. 몇 초 정도 진정의 시간을 가진 선생님은 이제서야 이야기를 이어나갈 준비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안 좋은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고, 뭔가가 필요하다고.


결국 이런 생각들로부터 주의를 돌릴 숙제를 내 주시는 것으로 오늘의 상담이 종료되긴 했지만, 나로선 선생님의 이런 반응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꽤 심각한 일이구나. 나는 그래도 예전처럼, 스티로폼에 녹아들어가는 전기 인두처럼 침대 위에 흐르듯 녹아들어서 ‘죽고 싶다’ 만 반복하거나, 혹은 내가 죽어 있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뇌와 싸우는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가끔 불쾌하고 섬뜩할 때가 있긴 해도 가벼운 생각으로 존재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것 같다. 무거운 것보다 가벼운 것이 언제나 더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숙제는 주의를 돌릴 수 있도록 타인의 루틴에 나를 맞추는 것. 무슨 뜻이냐면, 집에만 있거나 나만의 루틴을 세워 따르지 말고 타인이 만든 규칙에 소속되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취직은 불가능하니 강의를 듣거나 봉사 활동을 하는 식으로, 타인이 만든 스케줄표의 일부가 되는 것. 그렇게 하면서 밖에 나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할 일을 해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삶의 의미를 좀 찾아 보는 것으로. 하지만 잘 될지 모르겠다. 일 주일에 한 번이라도 직접 참여하는 것이 힘들다면 일단 일정이나 기관의 전화번호라도 알아오라고 하셨는데, 할 수 있을까.


뭘 해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어떻게 살고 싶다’ 같은 이상적인 삶의 목표도 없는데, 그리고 심지어 이젠 이런 생활이 지겹다 못해 나 자신과의 권태기를 겪고 있는데, 하늘이 이젠 나를 좀 놓아 줘도 괜찮지 않을까. 나의 남은 수명을 확인하고 기부하거나 판매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겐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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