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정말 유난히 힘들다
힘들다.
원래부터 삶에 의미를 두고 살지 않았고, 요즘 나의 우울은 '목적도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한 삶을 왜 살아가야 하는가'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의미 없이 산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 줄은 몰랐다.
15분 전에는 뒤꿈치가 찢어진 보송보송한 실내화를 꿰매면서 어차피 내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텐데, 왜 이걸 꿰매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입에 넣는 프링글스가 쓰게 느껴졌다. 가슴이 답답한 듯 아프다. 말 그대로 아프다. 공황이나 우울이 심해질 때마다 느끼는 증상이다.
하고 있는 일이 있다. 그 새 일이 두어 개쯤 들어왔다. 하나는 파일까지 전부 넘겼으니 내가 죽어도 차질 없이 진행 가능하시겠지, 생각했고 다른 하나는 한창 진행 중이라 지금 죽으면 민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을 가족이 따른다면 부고 소식은 그래도 늦지 않게 전해질 텐데, 작업을 하다 사라지면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고용주 그리고 담당 팀원들이기 때문이다. 민폐도 끼치고 싶지 않고 욕을 먹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일단 긴 낮잠에서 스스로를 깨운 다음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도저히 뭘 할 기분이 아니더라도 일단 앉아 있기. 그러면 뭐든 할 테고, 어제보다는 일의 진전이 조금 있을 테니까.
추가적인 일정은 4월 초와 4월 말까지 예정되어 있다. 4월 초의 일정은 역시 원본 파일까지 모두 전달하였고 내가 하는 일이라 해도 굉장히 단순한 일이니 내 존재가 사라져도 일은 무사히 진행될 것이다. 4월 말의 일정은 글쎄, 거의 다 완성해 놓고도 도무지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어렵다. 작업물이 웬만큼 완성된 지금도 하루에 몇 번을 못하겠다고 할까, 고민한다. 그래도 4월 말의 일정은 내가 중요한 일정은 아니다. 나 하나쯤 빠져도 감쪽같을 것이다.
내가 없는 나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힘들다는 말은 1차원적이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지금으로서는 힘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힘이 든다. 잠에서 깨어나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고, 눈을 깜빡이고 음식을 밀어넣으며 얼른 다시 잠들 수 있는 늦은 저녁에 되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힘이 든다. 깨어 있는 동안 부정적인 생각을 달래려 유투브나 웹 서핑을 하는 것도 힘이 든다. 책을 읽는 것도 힘이 든다. 아, 최근 책을 한 권 받았다. 얼른 읽은 다음 서평을 정해진 일자 안에 작성해야 한다. 그래도 이 일 역시 내 존재가 사라진다고 해서 상대방 측에 크게 타격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 1에 불과하니까.
10년도 훨씬 전 여전히 같은 문제로 힘들어하던 나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은 아프겠지만 지금 내가 살아서 느끼는 고통보다 더할까' 라는 말을 일기장에 썼다. 10년을 웃도는 시간을 그 위로 더 살면서 죽을 만큼 힘들었을지언정 고통을 싫어하는 겁쟁이답게 저 문장과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은 손에 꼽는데, 요즘은 다시 저 말에 뼈저리게 공감하고 있다. 여전히 아픈 건 싫지만 요즘은 정말, 머리나 가슴 안에 무언가가 죽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언제 죽었는지도 몰라 지금은 회색으로 미이라처럼 굳어버린 이름 모를 것을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는 기분이다.
버킷 리스트,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전부 없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도 없다. 대개 죽고 싶다고 하면 예전에는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그래도 힘내' 같은 말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요즘은 '벚꽃 피는 건 보고 죽자' '붕어빵은 먹고 죽자' 'ㅇㅇ 카페에서 신메뉴가 나온다던데 그건 먹어보고 죽자' 같은 위로와 만류가 돌아온다. 예전에는 그 위로에 마음이 움직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나 스스로 3월의 초입에 3월은 이래서 살아야 한다, 저래서 살아야 한다, 기대되는 일들을 적어두고 장난처럼 3월은 이것들 때문에라도 꼭 살아야 해, 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너무나도 강한 절망 앞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하등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정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래도 3월에 이건 해 봐야지'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지만 1초도 지나지 않아 '죽으면 다 상관없잖아' 라는 생각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3월을 그렇게 버티자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이야기했기에, 1초도 안되어 모든 걸 집어삼키는 그 절망이 주는 타격은 굉장히 컸다. 그건 타격이라기보다는 경악에 가까웠다. 그래도 결국 어떤 의지 같은 것이었는데.
사고 싶었던 물건들을 주문해 택배가 도착하는 날까지 기다리며 살아 있어야겠다고 다짐하는 방법도 이제 소용이 없고, 좋아하는 향이 가득 들어간 목욕용품을 사며 욕조에 받은 물 안에 몇 시간이고 들어가 있는 것도 이제 소용이 없다. 몇 달 전 상담 선생님의 권유에 작성한 '내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것들' 중 어떤 것도 지금의 나를 도울 수 없다. 리스트에 적힌 것들 하나하나를 읽어봐도 마음이 동하지 않고, 감정에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모두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글자들의 나열일 뿐이다.
정말 너무 힘들다.
힘들다는 말을 싫어해 텍스트로도 잘 쓰지 않고 입 밖으로 잘 내지도 않는데, 정말 힘들다.
삶의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고, 다들 죽지 못해 사는 것을 알지만, 난 삶을 쫓아갈 기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 그건 죽지 못해 산다고 대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다. 죽지 못해 산다고 대답하는 경우는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야지'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하게 여겨진다. 눈을 뜨면 잠을 자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하루하루의 연속, 그 굴레 안에서 어떤 것에도 감정이 동하지 않는 석상처럼 변한 심장을 끌어안고 사는 것, 그것은 악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