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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Apr 30. 2024

징크스

새 것만 좋아해요. 반짝거리죠. 다들 그렇잖아요, 맞죠?


나에게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 새 물건을 사면 곧바로 발길이 끊긴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 볼까. 무엇이든 발을 담근 뒤 적당히 익숙해지면 장비를 업데이트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걸 장비병이라고 하나. 돈을 모아 새로 사든 선물을 받든 새로운 물건을 장만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그 일에서 멀어지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이사를 가는 바람에 다니던 헬스장과 멀어지거나, 갑자기 일이 몰아쳐 기껏 선물받은 비싼 색연필에는 손도 못 댄다거나 하는 상황들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발생하다 보니 나는 이걸 내가 가진 징크스라 부르기로 했다. 대충 새 장비 징크스, 이런 걸로. 


그게 인간 관계에서도 적용되는지는 몰랐다. 아니, 이걸 인간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오갈 곳 없다고 느낀 깊은 수렁 한가운데에서, 전부 놓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선택한 아주 가벼운 관계. 빤히 보이는 그의 속을 모른 체 하고 두세 번 만났나. 모든 것이 너무 능숙해 보이는 사람에겐 절대 빠지면 안 돼, 나 자신에게 그렇게 단단히 일러 두고도 그만 그 사람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고 말았던 것이다.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난 불안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관계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에 다다르는 여정에서 자신의 심장과 깃털을 저울에 올려놓고 저울이 기우는 쪽에 따라 죄를 물었다고 했다. 우리는 각자 짝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 관계가 죄에 해당하지는 않을 테지만, 내 심장은 분명 깃털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상대방이 가진 심장의 무게보다 더 무겁겠지. 이 저울은, 이 관계는, 양심도 마음도 깃털보다 가벼워야 하는데. 그래야 이기는 건데.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더듬어 보면 그도 나도 둘 다 피곤에 절어 있는 상태였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그 날 유독 빨리 지쳤다.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고 난 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외로움에 힘들어했다. 왜 외롭지, 목적이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시간을 보냈으니 개운하거나 후련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뒤로 그는 연락이 유독 뜸해졌다. 여전히 웹에서는 온라인이면서도. 


사실 그 날 밤 남겨진 외로움에 힘들어하면서도, 나는 그가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태어나서 처음으로 콘돔을 주문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콘돔이 웬말이람. 그건 나도 어느 정도 정신이 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에게 있어 나는 여차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12345순위의 여자겠지만,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된다면 더 이상 그가 휘어잡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그런 다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콘돔이 배송된 이후로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후 뜸하게 이어진 연락에는 서로 바빠서 피곤하다는 말들만이 대화 창에 떠돌 뿐이었다.


앞으로 그와 나는 만나는 일이 없을까. 몇 번 봤다고 그새 정이 들고 신경 쓰이는 것이 참 무섭다. 콘돔은 신줏단지처럼 아직도 내 침대 머리맡을 지키고 있다. 며칠 전 그걸 보고 문득 내가 가진 징크스가 생각났다. 콘돔도 결국 새로운 운동복이나 색연필 같은 존재가 된 걸까. 새로운 물건을 가졌으니 앞으로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늘 꺾인 것처럼, 이번에도 무언가 하나 꺾인 것 같다. 웃기지, 내가 이렇게 나 혼자만 아는 방황을 북 치고 장구 치며 시작하고 끝내는 동안, 그는 여전히 내 이름을 모르고 나는 여전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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