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백수의 생 바라보기 4
“너 얼마 전 나온 ㅇㅇ영화 봤어?”
“응…그런데 소설 원작보다는 못하더라”
“그래? 난 그 영화 재미있던데”
“그럼 한번 소설로도 읽어봐. 난 소설이 더 재미있었어”
책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소설의 원작이 영화나 드라마의 작품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관심이 거기에 이르니 나름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한동안 머리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마치 수학 문제를 못 푼 아이의 마음처럼.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김영하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소설이나 에세이를 탈고한 후 작품들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후엔 독자가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고 재 창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른 이야기도 숨겨져 있다.
먼저 인간의 사유에 대한 집단적 특성과 개별적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사유의 집단적 특성을 살펴보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원인을 ‘인간의 상상’을 꼽았다. 그 상상으로 인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고, 심지어 언어의 규칙을 만들어 말을 통일하고 글을 창조하여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상상을 글로 표현하여 후세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획기적인 장치를 만든 것이다. 이제 그 상상은 후대에 유전이 되었다.
두 번째 사유의 개별적 특성을 알아보자. 인간은 합의된 생각을 공유하며 집단으로 살아남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단적 사고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자신과 자신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항상 주위를 살피고 경계하면서 살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선택이 옳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냉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선택은 항상 올바르다’라고 본인 스스로 끊임없이 합리화해 왔다. 그 생각은 유전자에 숨어 인간의 본성으로 각인되었다.
한편, 인간의 육체적 성질은 비교가 쉬웠다. 겉모습만 보아도 남보다 더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정신적 성질은 비교가 힘들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 항상 다른 이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 내면에 깊이 감추어졌다. 숨겨져 있는 만큼, 그 환상은 점점 커져 확신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항상 그런 확신과 신념을 경계해 왔다. 니체가 신념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김영하 작가의 글과 생각을 좋아하지만, 그가 만든 작품의 세계를 읽는 순간, 각자만의 세계를 다시 자신의 머릿속에서 재 창조한다. 심지어 그 세계는 작가의 세계와 다를 수 있고,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만든 세계에 만족하며 작품을 평가한다.
작가가 어두운 방안에 촛불 하나 켜 있는 화롯불 있는 방을 설정했다고 하자. 그는 단순히 이 어두컴컴한 방의 한 줄을 묘사했지만, 우리의 상상 속에는 그 촛불의 밝기가 제각각 일 것이다. 거기에 화롯불의 온도조차 정도가 다를 것이다. 그러니 그 방의 분위가 따뜻할 수도, 쓸쓸할 수도, 그저 암흑에 가까운 채도일 수도 있다. 그 상상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기호는 서로 다르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의 세계가 비주얼의 세계로 나왔을 때 비로소 파열이 일어난다. 아무리 훌륭한 감독이 자신만의 독특한 비주얼로 작품을 만들어도, 각 개인의 훌륭한 상상을 이길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은 스스로의 상상이 최고의 상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학작품이 그냥 문학작품으로써 남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책으로써 작품을 만나기보다는 누군가 에 의해 만들어진 영상으로써 만나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영화나 드라마 작가도 독자의 상상을 이기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