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 더빙 분석①─구관이 명관

강수진(강백호)과 서태웅(신용우) 편

by 김목청

*이 글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성우 연기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한 지 넉 달이 되어간다. 본래 처음 관람했을 때 쓰기로 했던 리뷰지만 10회 차 관람을 한 지금까지 미루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이전까지는 제대로 〈슬램덩크〉를 본 적이 없어서 더 공부하고 써야지, 했던 게 이렇게 늦어졌다. 하지만 농놀 열기가 아직도 사그라들 생각을 안 하니 늦어도 별로 티가 안 나는 듯(?).


……그리고 현재 시각 코엑스에서 성우 무대인사를 하고 있는데, 행사에 광탈한 사람으로서 눈물을 머금고 처량함을 동력 삼아 이 글을 써볼까 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퍼슬덩)의 캐스팅 리스트를 봤을 때부터 어디서 이렇게 잘하는 성우들만 박박 긁어다 모아 왔냐, 생각했는데 극장에 가서 보니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사실 강백호를 맡은 강수진을 비롯해 엄상현(송태섭), 신용우(서태웅) 등의 주연 성우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연기에 대한 감상이랄까, 그런 걸 말할 일이 별로 없다. 이병헌이나 황정민보고 연기 잘한다고 해봤자 별 감흥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만큼 유명하고 연차가 오래되면 이제 더는 새로운 건 없겠지, 보나 마나 잘하겠지, 하면서 갔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이렇게 오래 연기를 했는데 또 새로울 수가 있구나, 싶을 정도로. 역시 구관이 명관이다. (신극장판이라 성우들이 새롭게 바뀌었는데 구관이라고 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https://youtu.be/SIEP8N3ERr8

대원 비디오판과 SBS판 더빙을 비교한 영상. (출처 : Debbie's Anime 유튜브 채널)

〈슬램덩크〉는 크게 두 개의 더빙판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유명한 박상민의 ‘너에게로 가는 길’이 오프닝으로 쓰인 SBS판(홍시호 주연)이고, 다른 하나는 대원 비디오판(백순철→강수진 주연)이다. 현재 넷플릭스에는 무려 일본 원어 더빙 없이 ‘오로지’ 한국어 더빙만 올라와 있다. SBS판에 비디오판 오프닝을 편집한 버전으로, 이번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바로 그 대원 비디오판의 주연 강수진 성우를 제외하고는 전부 성우진이 바뀌었다.


대원 비디오판 〈슬램덩크〉 초반부는 강백호에 백순철, 서태웅에 장세준 성우가 맡아 연기한다. 내게는 강백호에 강수진, 서태웅에 김승준 성우가 익숙한데 듣고 있다 보면 왜 성우진이 교체되면서 백순철을 강수진이, 장세준을 김승준이 이어받았는지 딱 감이 온다. 실제로 백순철 성우의 연기에서(특히나 소리를 지를 때) 이따금 강수진의 향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강수진에게서 백순철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해야지 옳겠지만. 〈슬램덩크〉 이후의 모든 스포츠 꼴통들이 전부 다 인텔리로 느껴질 정도로 꼴통 같은 강백호, 이른바 ‘지성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독보적이다.


〈퍼슬덩〉에서 강수진 성우가 한 연기 중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리 내놔' 장면이다. 자막판은 자막판의 매력이 있고, 더빙판은 더빙판만의 매력이 있지만 그래도 이 장면에서만큼은 강백호의 '야수' 같은 집념이 강수진의 연기에서 더 잘 드러난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꽤 많은 장면에서 음소거를 하고 주요한 대사에만 집중한다.(ex.이 소리가 날 되살아나게 한다, 몇 번이라도 다시)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하나의 대사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마치 공만 보고 돌진하는 강백호가 된 기분을 만끽하도록 해주는 것 같다.


『THE FIRST SLAM DUNK re:SOURCE』118p

강백호가 공을 빼앗아오는 장면인데, 정우성은 원숭이나 곰 같은 동물에게 갑자기 공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이미지입니다. (…) 그래서 카메라가 뛰어드는 강백호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카메라의 방향을 이 앵글로 돌렸더니 강백호가 홀연히 나타났다는, 그런 이미지입니다. (이노우에)
『THE FIRST SLAM DUNK re:SOURCE』 119p 중


강수진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워낙 한국인들에게 익숙하다 보니 성덕이 아닌 사람도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다. 그 유명한 BBC 드라마 〈셜록〉에서 성덕들이 초장부터 모리아티의 정체를 스포 당한 것도 전부 강수진 소리가 가진 익숙함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셜록〉의 주인공은 정대만을 연기한 장민혁이다.)


그렇지만 〈퍼슬덩〉에서 강수진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미 오래전에 연기했던 캐릭터를 다시 연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상 자체도 농구의 세계에 난입한 맹수 같은 느낌을 주도록 제작한 것 같지만, 거기에 숨을 불어넣은 것은 강수진 성우의 연기다. 맹목적으로 공을 쫓으면서도 연기는 느긋한 느낌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짜릿한 기분이다! 영화를 10번 넘게 보면서도 강백호가 '이리 내놔'라고 하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다. 매번 놀라고 골 때리는 야생 원숭이의 활약에 기가 막힌다.


장세준에서 김승준으로 바뀐 사연 역시 짐작 가능하다. 공교롭게도 두 성우 모두 안경선배와 중복 캐스팅인데, 아무래도 서태웅이 워낙 과묵해서 그런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도 대사는 거의 손에 꼽는다.) 〈퍼슬덩〉에서는 송준섭 역을 맡은 박성영 성우가 안경 선배도 겸했다.


서태웅의 쿨뷰티스러움을 표현하기에 장세준 성우의 날카로운 미남자 연기가 제격인데, 이걸 그만큼 잘 계승한 성우는 역시 김승준밖에 없다. 마냥 미성이어도 아니고, 마냥 굵어도 안 되고. 베이스는 거친데 목소리 자체는 얇아야 하는 어려운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YMQB3UXzXo

〈토이스토리 1〉 더빙판의 우디(장세준 성우). 2편부터 더빙한 김승준의 전신이 보인다. (출처 : 에이치튜브 유튜브 채널)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장세준 성우의 대표작인 〈토이스토리〉의 우디 역시 김승준이 맡아오고 있다. 따로 떼어놓고 들어보면 그렇게 비슷하진 않은데, 연달아서 계속 듣다 보면 장세준이 연상될만한 사혼의 구슬 조각 하나를 김승준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장세준이 〈이누야사〉의 금강이라면, 김승준이 금강의 환생 가영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김승준의 대표작은 물론 〈이누야샤〉의 셋쇼마루다.)


https://www.youtube.com/watch?v=fESBNeTjMuI

〈토이스토리 3〉 더빙판의 우디(김승준) (출처 : Top Factory 유튜브 채널)

같은 이유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서태웅이 신용우 성우로 바뀐 맥락 역시 짐작할 수 있다. 쿨뷰티에서 ‘쿨’에 더 집중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난 신용우의 목소리 톤 자체가 시니컬한 것 치고는 꽤 따뜻한 계열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특징이 신용우의 특색을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진짜 대사 없더라…….


〈슬램덩크〉 TVA판에서 서태웅이 미도리카와 히카루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퍼슬〉의 카미오 신이치로가의 거친 동굴 저음은 다소 의외다. 아마도 원작자의 캐릭터 설정이 이번 극장판에서 많이 반영된 듯하다. 미도리카와 히카루가 가진 미성이 원작자의 의도에는 다소 빗겨갔을 수도 있지만, 쿨뷰티캐의 계보에는 잘 맞는다고 본다. 이번 극장판의 목소리도, 익숙한 서태웅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이 있다.


그리고 한국판 서태웅의 신용우가 바로 그 중간 지점에 있다. 쿨하고 시니컬하지만 묵직한 느낌을 내기 때문에, 원작자가 요구한 ‘남성성’과 TVA판의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소리 자체가 좀 까칠한(?) 편에 속해서 간과하기 일쑤지만, 한국 TVA판의 김승준 성우는 기본적으로 꽤 미성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지성준, 〈슈가슈가룬〉의 피에르, 〈후르츠 바스켓〉의 송유진 같은 미형 캐릭터도 자주 맡은 바 있고 말이다.(참고로 〈후르츠 바스켓〉의 송대협은 이명헌을 연기한 김영선 성우)


미도리카와 히카루 버전의 서태웅보다는 확실히 거칠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친 소리보다는 날 선 소리에 가깝다. 그리고 신용우의 서태웅은 확실히 더 무게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김승준보다 서태웅에 더 잘 어울리는 성우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신용우가 ‘ㅇㅇ있음’하고 나타난 격이다ㅋㅋ


신용우로 말할 것 같으면 시니컬한 쿨미남 계열의 연기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남성우들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은데, 그 시작은 아무래도 〈오란고교 사교클럽〉의 쿄우야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란고교 사교클럽〉5화의 한 장면. (출처 : 라프텔)

〈오란고교 사교클럽〉에는 강수진(강백호), 엄상현(송태섭)도 함께 등장하므로 감상할 때 참고하면 좋다. (사실 이 세 사람은 TV 틀면 어디나 나와서 작품이 겹치는 게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전까지 신용우가 〈아따맘마〉의 동동이 친구, 한돌이 같은 시끌벅적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 연기했다면, 이 무렵을 기점으로 〈오란고교 사교클럽〉의 쿄우야, 〈명탐정 코난〉의 괴도 키드를 맡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쿨뷰티 계열로 넘어간 듯하다. 여담이지만 나의 신용우 돌잡이 작은 〈블리치〉의 쿠로사키 이치고인데, 소년만화 주인공이면서도 동시대에 유행했던 〈나루토〉나 〈원피스〉의 주인공들과 달리 마냥 열혈계열은 아니고, 약간의 시니컬함이 두드러지는 역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최근에 〈블리치〉 애니메이션이 다시 부활했는데(WHY……) 성우진이 옛날 그대로인 걸 보고 또 눈물을 흘리며 북마크 해놨다…… 이 글 다 쓰고 보러 가야지…….


같은 고등학생이지만 괴도 키드는 장난스럽고 능글맞은 인물이기 때문에 서태웅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소리도 좀 더 어리게 내는 것 같고 말이다. (그리고 같은 반의 또 다른 명탐정 백준수는 정우성을 연기한 정재헌 성우)


나 역시 이번에 〈퍼슬덩〉을 보러 가기 전까지 서태웅이 강백호의 재수 없고 잘생긴 라이벌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마도 특유의 파워레인저 블루 같은 포지션(ㅋㅋ) 탓에 그런 오해를 심심찮게 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실은 잘났으면서도 잘난 척하지는 않는, 쿨해 보이지만 농구밖에 모르는 과묵한 남고생에 가깝다. 그리고 신용우는 그걸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신용우의 서태웅은 서태웅을 유구하게 사랑해 온 소녀들이 원하는 목소리와 원작자가 추구하는 목소리를 적절하게 조합한 최고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제작할 때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일본판을 비롯해 모든 성우를 교체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성대는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늦게 늙는 기관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연기를 하다 보면 소리도 변한다.(오래 공부하면 소리가 더 낮아진다고.) 그리고 한 인간로서의 세월의 격차뿐 아니라, 30년 동안 바뀐 소리의 트렌드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TVA 더빙판은 워낙 중복 캐스팅이 심하기도 했고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VgrFEsq05E

오디션 이야기는 10:35부터 (출처 : 강수진 성우의 유튜브 채널 '강수진과 빛의 덕후단')

강수진 성우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슬램덩크〉 관련 영상에 따르면, 성우 본인도 강백호의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 내가 25년 전에 강백호를 연기했는데 신극장판에 출연할지 말지 오디션을 보라고 한다? 나 같으면 빈정 상해서 안 한다고 할 텐데 대인기 탑티어 성우의 그릇은 역시 다르다. 백호를 보내준다는 생각으로 보고 왔는데(여기서부터 이미 탈인간급 그릇임) 역시 강백호는 강수진이 아니면 안 된다, 는 결론이 나서 결국 구작 성우들 중에 유일하게 다시 연기를 하기 되었다고.

녹음 현장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내가 〈퍼슬덩〉의 성우진이었다면, 강수진이라는 성우가 든든히 버텨주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위안이 되고 의지하고 싶었을 것 같다.


어떤 것들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기도 한다. 태섭이의 형이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태섭이가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던 것처럼 어떤 목소리는 변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지만 뚝심 있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도 한다. 골 밑을 지키는 센터 강백호처럼.


너무 길어진 관계로 채치수, 정대만에 대한 이야기는 2편에……. 주인공 송태섭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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