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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연 Jun 21. 2022

서른다섯, 서른하나

가장 젊고 빛나는 오늘의 나

얼마 전 밴드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란 곡을 가수 윤하가 커버하여 부른 것을 보았다. 윤하가 노래를 매우 울림 있게 부른 까닭인지, 사연 많을 벚꽃이 배경을 가득 채운 탓인지 많은 방청객들은 눈물을 훔쳤다. 화면에 잡힌 눈물의 주인공들은 내가 보기에는 매우 어려 보이는, 25살의 기억이 선명할 것 같은 청년이었다.


단상 같은 21,25살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눈물을 흘리던 그 청춘과 같은 마음이 되지 않을까. 마음이 메말라 버린 탓일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에게도 그들처럼 눈물짓던 노래가 있었다. 바로 이은미가 부른 <서른 즈음에>다. (원곡은 김광석이지만 여성의 음성에 더 마음이 울렸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서툰 육아에 지친 어느 날, 그저 흥얼거리던 이 노래가 돌연 청춘의 종료를 선고했다. 마음이 발끝까지 철렁 내려앉아 아이 옆에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힘든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시작된 감정이었겠지만, 적어도 청춘이 가질 수 있는 해맑음은 종료됨이 확실했다.


출산 후 빠진 머리는 삐죽삐죽 올라와 흡사 잔디 같은 모양새가 되었고, 이를 감추려 모자를 눌러쓰고 아기띠를 한 모습은 영락없는 아줌마 같았다.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친구들을 만나면 나만 먼저 늙은 기분이 들어 괜히 울적해 지곤 했다.

하지만 마흔 살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때의 나를 사진으로 만나니 어설픈 엄마의 느낌이 나는, 더도 덜도 아닌 딱 30대 초반의 젊음을 간직한 나일 뿐이었다.

실제 나이보다 체감한 나이가 늘어났던 것은 출산이나 육아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얹었던 마음의 나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학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안 어울리는 다섯이 모였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은 만큼 캐릭터도 제 각각인 우리는 다채로운 형태의 삶을 나눈다. 다섯 명의 교집합 면적이 크지 않은 우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입을 모아 말하는 소재가 있다면 ‘나이 듦’이다. 늙어서 그렇다는 말도 거침없이 우리 입에서 흘러나온다. 전공 특성상 20대 초반부터 일을 하고 30대부터는 조직의 고연차가 된 탓인지, 소위 꼰대의 느낌이 꽤 진하게 흘러나온다. 동시대의 동년배가 나눌 수 있는 재미있는 소재인 만큼 우리의 나이 듦을 한탄하기도, 반대로 ‘요즘 애들’과 견주어 나이 듦을 과시하기도 하면서 이야기가 탄력적으로 흐른다.

한바탕 세월의 흐름을 타고나면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런 이야기 또한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들었다고 슬퍼하던 30대 초반 아기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오늘이 우리의 젊음을 예찬할 수 있는 젊은 날의 한 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서 흘러나온다.


이제는 <스물다섯, 스물하나>만큼 <서른 즈음에>에도 쉽게 휘청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뒤돌아 봤을 때 아쉬운 마음보다는 그 시간을 건너온 나를 대견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어른이고 싶다. 어른의 마음이 되려면 현재의 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족스러운 현재의 내가 되어야 과거가 그립거나 아프지 않을 테니까.

깊어진 듯한 팔자주름이 조금은 거슬리지만, 혈색을 살피고 내면의 나를 살피는 눈으로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지금의 내가 가장 젊고 빛난다고 믿는다. 오늘도 주어진 젊음을 최대한 끌어안아 오늘의 나를 이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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