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하게 사는 즐거움
“학교에 가면 한글 다~가르쳐주는데 웬 사교육이야~ 애들이 너무 불쌍해!”
어느 할머니가 한 말이 아니다. 3년 전의 내가 사교육을 고민하던 7살 아이를 둔 친구에게 한 말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떼는 문제를 걸음마를 언제 떼느냐와 동급의 문제로 여겼다. 조금의 시간차가 날 뿐 우리 모두 결국엔 걸음마를 떼었고 한글을 배웠으니까. 4-5세부터 학습지니 학원이니 관심 갖는 분위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그 당시 친구는 별말을 하진 않았지만, 열변을 토하는 나를 보며 마음 속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우리 엄마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우리 아이는 사교육을 하지 않았을까? 했다. 그것도 5살에!
5살 가을 무렵, 어린이집 선생님은 아이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다며 집에서 별도의 지도를 해주기를 권유했다. 비교적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같은 반 또래는 대부분 한글을 더듬더듬 읽는 수준이라는 정보도 접하고 나니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아이는 선생님 흉내를 내며 나에게 꿀밤을 먹였다. 이건 직접 겪지 않고는 따라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속이 뒤집혔으나 물증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미움받지 않길 바라는 다소 찜찜한 이유로 시작한 학습지는 아이를 힘들게도 불쌍하게도 만들지 않았다. 학습지 선생님이 집에 방문하는 날이면 신이 나게 집으로 향했다. 7살이 된 아이는 한글책을 아주 잘 읽을뿐더러 어설프지만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사교육을 권유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편협한 아집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다소 철학적인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오래되고 익숙한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편치 않은 마음이 종종 되곤 한다. 익숙한 곳에 머무르고 싶은 관성 같은 마음이 된다. 어느새 야금야금 주변에 벽을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 나는 여기까지가 좋아’ 같이 나만의 기준값이 점점 똑 부러지게 정리되어 간다. 바로 이 과정이 ‘꼰대’가 되어가는 모습인 것 같다.
그는 도대체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난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내적인 균형을 깨뜨리거나 외적인 일상의 질서를 마구 뒤섞어 놓는 일이 생기는 것을 혐오하기까지 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
주인공 조나단은 작은 방한칸짜리 집에서 30년간 변함없이 살고 있다. 안정적으로 영원할 것만 같던 집 앞에 비둘기 한 마리가 똥을 싸놓고 앉아있다. 그때 조나단의 멘털은 완전히 흔들리고 만다. 안전하다고 여겼던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말이다.
강박에 가깝게 변화를 격렬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주위에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얼마나 될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생각도 시대적 배경에 따라, 개인 경험에 의해 변하기 마련이다. 나의 사교육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 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려는 사람은 ‘참아 내는’ 삶을 택한 거나 다름없다. 레고 블록을 이리저리 옮기듯 유연하게 ‘틀’을 재배치해보는 ‘행동하는’ 삶은 어떨까?
한때는 생각의 뾰족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곤 했다. 쉽사리 깎이지 않는 뾰족한 생각을 자존감이라 여겼다. 하지만 뾰족하던 돌도 바람과 물을 통과하면서, 또 다른 돌을 만나면서 부서지고 다듬어진다. 그런 몽돌을 우리는 예쁘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이 몽돌과 같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즐겨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