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해방(房/room)'을 찾다
어떤 영상에 누군가가 희망을 꺾으려는 듯 댓글을 달았다.
"이 질환에 완치는 없습니다"
나 역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경험했다.
피부만 돌아오면 가진 삶을 더욱더 누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 오랜 시간 동안 피부는 나름의 항상성을 유지하며 마치 네 인생에 '보통' 같은 건 허상이니 꿈깨라고 말하는 듯했다.
못 가진 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제한된 먹고 마시는 것들에 대해 집중할수록 삶이 비극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비극으로 결말을 짓기는 싫었나 보다.
건강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내 정신이라도 잘 지켜내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들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로부터 억지로 자신감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13년이 넘게 이상한 피부랑 살려다 보니 수도원이나 산에 살지 않고도 내면 달래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하게 되었다.
내면을 돌보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겉보기엔 식상하고 어렴풋하고 싱거운 것들 투성이다.
본인의 취향에 맞게 몰두할 수 있는 일 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효과가 좋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한 가지 있긴 하다. (이미 하고 있다면 사과한다)
시작은 짝꿍의 추천이었다. 그이의 추천으로 아침일기라는 이름으로 진심과 일상을 기록하고 쓰는 일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게을러지기 쉬운 일이었다. 본인이 쓰기 가장 편한 시간에 손에 가장 많이 닿을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로 읽고 쓰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나의 경우, 언제나 다이어리에 손으로 쓰고 싶었지만 결국 루틴으로 정착할 수 있던 방법은 에버노트였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나만의 습관, 기호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억눌린 감정들이 조금씩 풀어지고 해소되었다. 객관적인 자료들은 교정할 생활습관을 찾을 수 있게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차곡차곡 쌓인 소중한 글들은 훗날 스스로에게 이만큼 솔직할 수 있었던 것에 감격하며 나와의 사이를 돈독하게 할 수 있었다.
아프면 아픈 날을 적었고, 단순하게 그날 있었던 일을 적기도, 조금 좋아진 날은 희망의 기도를 쓰기도 하였다.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을 적고 느낀 것들을 적었고 이해하려 하고, 사색했다.
거울을 예민하게 살피거나 외면하려는 감각보다 더 다양한 감각들을 일깨웠다.
나는 이렇게 글쓰기라는 움직임을 통해 내면의 땔감을 비축해두고 있다.
엥, 피부이야기에서 웬 글쓰기 추천이람. 들여다보니 너무 뻔한 말인가?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뻔한 산책까지도 강력 추천한다..)
그저 내가 찾은 해방은 글쓰기였고,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숲이라고 말하고 싶다.
거울에선 보이지 않던 자아와 만나 대화하는 동안 어느새 피부의 표면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질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한동안은 귀여움으로 먹고 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기의 모습을 하고 태어나니까.
그때 부모든 처음 본 누구에게든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이제는 똥을 예쁘게 싸도 칭찬받지 못하는 어른의 삶이 되었으나 그 사랑을 기억하는 세포로 살 수 있게끔 하려고 그런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닐까? 볍씨만 한 사랑이었다 하더라도.
아기가 귀엽게 생겨먹은 이유는 그런 게 아닐까?
어떤 아기를 보며 이런 단상에 젖었다.
나도 분명히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그 시점의 나는 지금보다 가진 게 없는 날것이었으나 충분히 소중한 존재였음을 다시금 되새기고 명확히 해본다.
십 년 전쯤 한 친구의 위로의 말이 기억나 리마인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