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어머니께서는 사철에 맞게 무엇을 해다 장에 내다 파셨다. 우리 동네는 시내와는 너무나 먼 시골이어서 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고도 몇 학년이 되어서 하루에 서너 번 버스가 다닌 것으로 기억된다. 대여섯 개의 마을이 산속 깊이 옹기종기 부락을 이루며 살았다.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시내까지는 버스를 탈 수 있는데 까지는 한 시간도 넘게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그런 길을 어머니께서는 머리에 이고 지고 무엇을 내다 파셨다. 봄 여름 가을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겨울에도 나무를 해다 그 먼 길을 팔러 가셨다. 때로는 이웃집에 리어카를 빌려 나무를 싣고 오빠랑 새벽 일찍 나서곤 하셨다. 아침에 눈을 떠 보면 썰렁한 방안 윗목에 보리밥에 김치와 멀건 된장이 아침이 차려져 있고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살이 에이는 추운 날씨인데도 어머니께서는 나무를 팔러 가고 계시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아직 온기가 남은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서 딱지를 접거나 해가 어느 정도 올라오면 양지바른 솔밭에서 솔방울을 주워 모으기도 하면서 놀았다. 내가 주워 모은 솔방울은 우리 집 불쏘시개로 쓰고는 했다. 그때에도 아버지께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집에는 계시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내가 초등학교 2,3학년쯤 되어서야 집에 안주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해소병이 있었던 것 같고 자주 숨이 차 하셨고 가래를 자꾸 뱉으시는 것 같았다. 가끔 작은 과수원을 돌보시는 일 외에는 별다른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주로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고 아버지께서는 주로 꽃을 가꾸시는 일만 하신 것 같았다. 아직도 눈에 선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래 위채가 초가집이었던 우리 집은 기억자로 방 세 칸과 디딜 방앗간과 외양간 그리고 헛간이 있었고 부엌이 있었고 시골 초가집이지만 제법 규모가 큰 집이었다. 높은 댓돌 위에는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이 늘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안방문을 열어놓고 두 파을 베개 위에 고이시고는 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시고는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