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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r 18. 2024

기억의 시작

순옥은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바꾸는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고, 그 하늘 아래 앙상한 가지를 잔뜩 추켜세운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언제 그렇게 쓸쓸하고 삭막한 계절이 다가왔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이미 너무 오래 틀어서 늘어져 버린 가요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희미한 웅얼거림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조차 순옥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너, 이 금 넘어오기 없기다. 알았지?” 순옥이 준호에게 한 첫마디 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준호도 이에 질세라 순옥에게 한마디 던졌다. “너야말로 넘어오지 마.” 까짓 책상 위에 그려 놓은 금이 뭐라고 처음부터 순옥과 준호는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수업 시간은 물론이고 휴식 시간이나, 심지어 교실이 아닌 운동장에서까지도 서로를 멀리했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랐고, 사는 동네도 달랐기 때문에 등하교 시간에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랬던 그들 사이에 언제부터 인가 화해의 분위기가 일고 있었다. 책상 위에 그어졌던 금은 어느새 희미해졌고, 그렇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그들이 가끔 같이 걷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준호의 가족이 먼 곳으로 이사하면서 그들의 인연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동창 관계는 거의 극단적인 유형을 보인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가깝게 지내는 동창이 있는 반면에, 졸업과 동시에 헤어져서 전혀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끝내는 만나지도 못하는 사이로 남는 동창도 있었는데, 순옥과 준호의 관계는 그사이 어중간한 지점에서 맴돌고 있었다.

     

순옥은 친구를 통해서 고향을 떠난 준호의 소식을 가끔 듣기는 했다. 고향에서 중학교까지만 마친 순옥은 도시에서 대학교까지 마치고 대기업에 입사한 준호가 자기와 같은 동창을 기억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당연히 준호의 주위에는 대학을 졸업한 멋지고 똑똑한 여자들이 많을 것이고, 그중에서 준호의 눈에 든 여자가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끔 친구들이 준호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일부러 순옥은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어떨 때는 준호가 친구들을 보고 싶다면서 고향에 들렀을 때도, 순옥은 친구들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준호가 살던 동네는 순옥의 집과는 거리가 있었으므로, 자기가 동창 모임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왜 안 가냐고 할 친구도 없었다. 그렇지만 동창 모임이 있던 날이 지나서는 항상 준호가 순옥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친구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준호와의 인연은 그 정도에서 끝내고, 순옥은 늦은 이십 대의 나이에 집안 어른의 중매로 결혼했다.

     

순옥의 남편은 성품이 어진 남자였고 순옥을 끔찍하게 아껴주었지만, 가족 모두가 순옥에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밖에 졸업하지 못한 순옥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시부모는 물론 순옥보다 나이가 많은 시동생과 시누이까지도 은연중에 순옥을 무시했다. 그런 집안에서 처음부터 왜 순옥과 남편의 결혼을 받아들였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남편이 나서서 순옥을 감싸 안았지만, 어떨 때는 남편의 그런 행동이 순옥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순옥은 그럴 때마다 생각지도 않았던 준호 생각이 떠올랐다. 왜 준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순옥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순옥이 준호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잠깐이라도 사귄 적이 있었다든지 하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순옥은 항상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순옥이 남편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준호를 그리워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정도로 남편에 대한 순옥의 애정이 식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자신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해도 시간은 흐르는 법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순옥에게도 새로운 생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동생과 시누이도 모두 독립하고, 시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순옥 가족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조차도 순옥에게는 영원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라도 자신의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아이들도 모두 성장해서 순옥과 남편의 곁을 떠났고, 급기야 남편까지도 순옥을 홀로 남겨 두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마치 순옥의 인생을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처럼 떠났다. 언제 다가왔다가 떠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의 순간적인 만남처럼 그저 가슴 한 귀퉁이에 남았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다. 도무지 언제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휙 지나간 시간이었다. 갈래머리로 땋고 책상 위의 금을 경계로 준호와 아웅다웅하던 때부터 홀로 남은 지금까지의 시간은 마치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처럼 찰나에 불과했다. 순옥은 지금도 왜 자신의 기억이 준호를 알게 된 이후부터 시작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그 이전의 기억도 존재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순옥 기억의 시작은 책상 위의 금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점점 희미해져 가던 그 금처럼, 순옥의 기억과 힘들 때마다 떠올랐던 준호의 얼굴까지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언제라도 순옥이 떠올리기만 하면 생생하게 그려질 것만 같았던 준호의 얼굴도 그렇게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순옥은 다 식어버린 찻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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