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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삼중 추돌 현장을 목격하다.

by 정이흔

모처럼 퇴근길인 딸을 데리러 전철역으로 향했다. 원래 같으면야 딸이 자기 차를 운전해서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것이므로 내가 데리러 갈 이유가 없었지만, 오늘은 퇴근 후 다녀올 곳이 있다면서 차는 집에 두고 출근할 테니 아침에 직장에 데려다주고 퇴근할 때는 전철역으로 데리러 나와달라고 했다. 딸은 자기 부탁이라면 내가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쩌면 그렇게 당당하게 부탁하냐고 해 봐야 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내가 그렇게 길을 들였기 때문이다.

딸의 부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왕 자기 차를 갖고 나오는 김에 전철역까지의 경로 중에 기름값이 싼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와달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러냐고 했지만, 기름을 넣고 얼마라고 말하면 돈을 주겠다는 딸의 말에 귀찮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딸의 차에 올랐다. 가다 보니 조금 일찍 출발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침 퇴근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길이 막히는 바람에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전철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철역에 도착해 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딸이 차가 없었기도 했지만, 차가 있었다고 해도 차로 출근하는 것보다는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것이 더 편한 곳에 있는 직장에 다녔던 까닭에 아침저녁으로 내가 항상 전철역까지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딸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아침저녁 일과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니 오늘의 퇴근길 마중은 거의 사 년만의 일인 셈이다.


사실 딸이 차를 사고도 나는 딸의 차를 운전해 본 적이 없었다. 딸이 새 차라고 애지중지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 아침이면 자연스럽게 각자 자기 차를 운전하고 집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도 딸 차의 운전석에 앉을 일이 없었고, 딸도 자기 차의 조수석에 앉을 일이 없었던 것을 오늘 처음으로 조수석에 앉았다면서 내가 운전하는 내내 종알거렸다.


지금은 운전하는 일이 직업인 나는 비교적 안전 제일주의 운전을 좋아한다. 아무리 바쁜 세상일지라도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운전하면 복잡한 도로 위에서 짜증이 덜 나기도 하지만, 난폭운전에 따른 갑작스러운 사고도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딸이 처음 차를 사고 출근한 날부터 아침에 딸을 보내며 항상 안전운전을 당부하곤 했다. 마치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부모는 집 나서는 자식에게 차 조심 하라고 당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구십 인 어머니가 환갑이 지난 아들에게 차 조심 하라고 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생각 같아서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고 치부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도 나이가 들어가니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딸을 보면 왜 운전 항상 조심하라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간혹 그런 이야기를 한다. 운전대만 잡으면 과격해진다는 말 말이다. 평소 말이 없던 사람도 운전석에 앉으면 말이 많아지거나 남에게 험한 말을 하지 않던 사람도 짜증 나는 도로 사정에 접하면 입에서 자연스럽게 욕이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하긴 나부터도 그러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딸도 자차를 운전하고 나서부터는 조금 과격해진 것 같았다. 그게 뭐 운전이 과격하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말로만 그렇다는 것이다. 옆에서 험하게 운전하면서 도로 위의 교통질서를 해치는 운전자를 볼 때마다 저렇게 운전하다가는 사고라도 한 번 당해야 정신을 차린다느니 하는 말은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씩은 하는 말이므로 특별한 것도 없다고 하겠지만, 어쨌든 집에 와서 출퇴근 길에 겪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아름다운 미담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대부분 이야기가 길 위에서 화나는 상황에 부닥쳤던 이야기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나는 항상 조급하게 운전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딸과 오는 길에 마주해서는 안 될 광경을 목격했다. 집으로 오는 경로 중에 고가도로 아래에서 좌회전하자마자 곧바로 고가에서 내려오는 차로와 합류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곳에서 삼중추돌 사고를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원래 그런 운전자들이 있지 않은가? 멀쩡히 잘 운행하다가도 누군가 옆 차로에서 자기 차 앞으로 차로 변경을 할라치면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와서는 기어이 옆 차를 다시 원래의 차로로 밀어내는 운전자 말이다. 나는 평소 가장 얄미운 운전자로 그런 운전자를 꼽았는데, 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딸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냥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되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와 딸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했다. 저런 운전자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사고라도 한 번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거라고 말이다. 아니, 아마 사고를 당해도 그 버릇은 고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런 상황이 우리 차 바로 옆에서 일어났다.

고가 아래에서 좌회전한 내 차는 왼쪽 차로로 차로 변경을 한 후에 고가 위에서 내려오는 차로에 진입하기 위하여 좌측 방향지시등을 켜고 옆 차로로 진입하였다. 그때 마침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부류의 운전자가 옆 차로에서 갑자기 속도를 올리며 내 차의 진입을 가로막았다. 속으로는 슬며시 부아가 치솟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양보를 한 후에 그 차가 지나간 후 다시 방향지시등을 켜고 옆 차로로 진입을 시도했는데, 그 뒤에서 오던 차 역시 굉음을 울리며 날아와서 내 차 옆으로 지나쳐 갔다. 두 번이나 그러니 좋게만 생각하던 나도 기분이 나빠져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뻔했다. ‘그래, 그렇게 해 봐라 그러다 언젠가 사고 한 번 당해야 정신 차리겠니?’ 순간 마법처럼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옆 차로에서 나를 지나친 차량 세 대가 연쇄 추돌을 일으킨 것이다. 나와 딸은 생각건대, 우리 차가 차로 변경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급가속하던 차들이 미처 앞의 차를 피하지 못하고 추돌한 것으로 생각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마치 내가 잠깐 떠올린 상상이 그 차의 운전자들에게 무슨 저주라도 내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저주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가 일어났다.

우리는 그 차들을 피해 옆으로 지나치면서 보니 운전자들이 내려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왜 그리 짧은 시간에 목숨을 걸었는지 모른다. 정상적으로 차로 변경을 시도한 내 차를 보내면서 저속으로 진행했더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하긴 뭐 그런 조급한 성격에 사고를 피했을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고는 났다. 서행하던 차를 추돌한 차는 거의 차체가 살짝 떠올랐다가 주저앉은 것처럼 흔들렸고 보닛은 아예 절반으로 구겨졌지만, 다행스럽게 운전자들이 차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우리는 서행으로 그 차들을 피해 사고 현장을 떠났다.

사람들은 항상 일을 닥치고 나서 후회한다. 그들도 분명 퇴근길에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려다가 결국 사고를 냈고, 그 대가로 오히려 집에 도착하는 시간만 늦어졌을 것이다. 경찰과 보험회사 직원까지 출동해야 사고 차량을 안전지대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도 손해일 것이고 금전적 출혈도 있을 것이다.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나마 이후로 안전운전을 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사고가 주는 선물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물론 그것도 운전 습관을 고치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일을 목격하고 나니 안전운전과 양보 운전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고, 앞으로 더욱 조심해서 운전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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