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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벌써

by 정이흔

정말 순식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시간이다. 그토록 기다려 왔던 황금 들녘이었는데, 잠시 한눈을 팔다 돌아보니 어느새 벼는 베어지고 밑동만 남은 쓸쓸한 논이 되어 있다. 가을도 베어진 벼와 함께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이 집으로 이사를 계획하면서 가정 먼저 떠올린 것은 거실 창으로 내다보이는 황금 들녘을 그려서 집안 전실 정면에 거는 일이었는데, 그것도 이제 내년 가을로 미루어야 한다.


아침저녁 출퇴근 길에 논 사이의 좁은 포장도로를 달리는 멋도 지금까지 살았던 도시풍의 주택에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간혹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 도로 주변이 온통 어두컴컴해도 가로등 대신 길을 밝히는 노면 양쪽 가장자리의 작은 불빛이 마치 컴컴한 바닷속 깊이 있다는 용궁처럼 어떤 신비한 곳으로 나를 이끄는 것만 같다. 그리고 길을 돌아 조금은 고지대인 집에 도착해서 바라보는 동네의 야경도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운치가 있는 풍경이다. 비록 황금 들녘을 그리겠다는 첫 번째 목표 달성은 아쉽게 실패했지만,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에 앉아 동네의 사계를 그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미산동의 四季展’이라니, 정말 멋진 상상이다.


비단 그림만은 아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떤가? 내 방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 줄 글을 적는다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될 것이고, 조금 길게 적는다면 ‘수필’이 될 것이며 동네의 풍경을 배경으로 나의 문학적 상상을 펼쳐 본다면 분명 멋진 ‘소설’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글과 그림에 어울리는 이 집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사는 곳이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가 이처럼 나의 일상에 변화를 줄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어렴풋이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현실적으로 다가올 줄을 몰랐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려왔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글도 쓰고 있다. 하지만 글과 그림이 내 마음대로 써지거나 그려지지 않을 때마다 나의 주위를 탓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 글과 그림을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글과 그림을 위해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야만 즐길 수 있는 취미라는 생각 때문에 글과 그림에 전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핑계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자. 만일 내가 일상의 일부를 턱 하니 떼어내어 글과 그림에 투자했다고 한들 그때라고 내가 만족하는 결과를 이루었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들인 시간에 걸맞은 성과가 있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나의 뇌리를 지배하려 했을 것이고, 그만큼의 심적 부담은 더했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취미를 즐긴다는 생각 같은 것은 멀리 내던지고, 주위에서 나의 창작 결과물에 대한 호평만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 뻔하다.


창밖은 가을 날씨답지 않은 따가운 햇살이 들판을 내리쬐고 있다. 모처럼 집안일 때문에 출근을 미루고 일을 처리하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하니 어떻게 써야 할지는 고사하고 무슨 글을 쓸지부터 선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공연히 이래서 어떤 글이든 평소에 계속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 있는가 싶었다. 노트북 창작 폴더에는 이미 몇 번씩 주물럭대서 낡아 해진 옛글만 하릴없이 뒹굴고 있었으며, 그들도 이미 나의 손길을 원하지 않는 듯 보였다. 원래 예전 같으면 조금이라도 수정해서 탈고할 욕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감하게 삭제하지도 않는다. 이미 나의 마음은 제자리를 잃은 지 오래된 듯하다. 마치 쓸모없어 보이기는 해도 정작 버렸다가는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에 스스로 엮이기를 자청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후회할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아내가 다가오더니 밖에 나가자고 한다. 장 보러 갔다가 병원에 가서 독감 예방주사도 맞고 오잔다. 매번 이맘때쯤 맞던 예방주사인데, 올해는 어쩐 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가서 옷을 챙겨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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