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안개의 늪이 떠오르던 아침을 삼켜버렸고, 아침 삼킨 그 늪 깊은 곳에서 뿌연 불빛들만이 전속력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매일 새벽 눈 뜨면 보이는 광경이다. 동해안이나 전국 명산의 일출 명소에서도 온전한 일출을 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기껏 며칠 되지 않다고 하는데, 내 집 안방에서 보이는 너른 들 너머 산등성이에서는 매일 아침 거르지 않고 해가 떠오른다. 간혹 아침 안개가 짙은 날이면, 오히려 안개가 해를 삼켜버린다. 그러다가 그 안개 한가운데를 달리는 자동차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안개를 녹여 걷어낼 때가 되면, 그제야 비로소 이미 산등성이를 벗어난 해를 볼 수 있게 된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마음은 모두 제각각일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새해 첫날 일출을 보러 일출 명소를 찾는다. 나도 언젠가 한 번 동해안으로 차를 몬 적이 있었다. 결국 주차장이 되어 버린 고속도로에서 무단으로 차를 돌려 돌아오긴 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일출 맞이 시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동해행은 끝이었다. 물론 새해 첫날이 아닌 날 간혹 일출을 보긴 했지만, 그런 일출 맞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런 날 아침에 맞은 일출은 어쩌다 숙소에서 조금 이른 시간에 깨어난 것에 무상으로 더해진 덤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매일 아침 한 번씩은 다가오는 일출이 특별하게 새로울 리는 없었다. 남들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새로운 마음의 각오를 다진다거나, 혹은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곤 한다.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신비한 자연의 힘에 의지해 무엇인가 이루어 보고 싶은 마음을 기댈 대상으로 일출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긴 수평선이나 산등성이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면 차라리 장엄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의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글거리는 자태로 주위를 집어삼키듯 솟아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인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 줄 힘을 지닌 듯 보인다. 일출이 지구 자전의 결과에 따른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출을 직관하는 순간만큼은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해가 자력으로 솟아오른다고 믿는다. 그 얼마나 위대한 기운이란 말인가. 무엇 하나 받치는 것도 없는데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힘이라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출의 신비라고나 할까?
일반적으로 일출이라 하면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광경을 말한다. 물론 산 능선을 넘어 떠오르는 해도 있지만, 그런 일출은 웬일인지 감흥이 덜하다. 아, 산에서도 수평선 위로 솟구치는 해를 볼 수는 있다. 구름이 잔뜩 낀 운해(雲海)도 바다이긴 하지 않은가? 간간이 구름을 뚫고 솟은 산봉우리는 구름의 바다에 솟은 작은 섬 정도일 것이다. 언젠가 지리산에 올라 드넓은 운해를 본 기억이 있다. 내가 산 정상에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바닷물 출렁이는 해안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착각이 들 만큼 바닷물과 구름은 닮았다. 그런 운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기분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때와 같은 것 같긴 하다. 하긴 바다에서 떠오르면 어떻고, 구름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르면 어떤가?
그런 일출을 요즘은 거의 매일 보고 있다. 어느 날은 산등성이를 딛고 올라서는 해를, 또 어떤 날에는 아침 안개 자욱한 늪 저 멀리에서 떠오르는 해를, 어떤 날은 안개를 걷으며 이미 중천으로 떠오른 해를 바라본다. 마치 얼른 일어나서 함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자고 등을 떠미는 것만 같다. 내가 조금이라도 늦을 것처럼 보이면 여지없이 내방 창의 커튼을 뚫고 들어와서 닫힌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이후로는 아침마다 해의 성화를 견뎌낼 수 없다. 해는 아침마다 가장 먼저 인사하고 손을 내미는 절친이 되어 간다. 마치 예전에 아침마다 딸의 방에 들어가서 잠을 깨워 일으켜 주던 내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이제 하루라도 일출을 보지 않으면 침대에서 일으키는 몸이 찌뿌둥함을 느낀다. 아마 생각건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별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출의 친근함을 요즘은 부쩍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