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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수의견 Dec 13. 2023

서울의 봄과 내란음모

지워진 역사, 남침 임박


46년 10.1사건(대구폭동) 당시 죽은 경찰가족들에 대한 살해수법들을 보면 식인 야만종도 이들보다 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보수의 땅 경북/대구에서 200만이 들고 일어난 봉기인데 이런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란 사실도 모르는 한국인이 태반이다.


-경찰 부인을 발가벗기고 시신을 끌고다니며 사지를 찢어죽였다.

-사지를 덜렁거리며 병원에 찾아온 경찰을 의사들이 치료 거부하고 폭도들에게 인도하자 그 자리에서 머리에 돌을 내리쳐서 죽였다.


대구폭동


왜 이 때 경찰이 주 타켓이 됐냐하면, 당시엔 국군 창설 전이라 국방경비대만이 존재했고, 미군정 하 경찰이 치안과 안보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국군은 48년 5.18일에 창설되는데, 이 대구폭동으로 와해된 남로당원들은 전략적으로 대거 군 입대하게 된다. 이들이 군 내부 좌익세력과 합세해 일으킨 무장폭동이 바로 여수-순천 군사반란 사건이다.


 대구폭동은 소련군정 스티코프의 지령으로 계획된 것이고, 이어 48년 제주4.3 - 48년 10.19(여순군사반란) - 50년 한국전쟁까지 동일선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바로 이어지는 한국전쟁 시에도 빨치산(게릴라/한국 식 베트콩)으로 활동한다.




한국전쟁 종전(1953) 20여 년 후. 내란 소요사태 후 남침이란 패턴은 다시 재현된다. 이것은 베트남전에서와도 같이 월맹정규군과 주민으로 위장한 베트콩 게릴라가 전투와 테러/소요사태/포섭/반란을 동시에 진행하는 전형적인 공산당식 양면전선 전술이다.


74.8(육영수 여사 시해) - 79.10월(부마사태) - 79년 10.26(박정희 대통령 시해) - 79년 12.12(정승화 체포 작전) - 80년 4월(사북파업) - 80년 5.18(광주사태)로 이어지는 일련의 소요사태도 한국전쟁 직전과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띈다.


당시 일본은 6차례에 걸쳐 남침 첩보를 신군부에 주었고 이것은 계엄령의 명분이 된다. 1979년 12월에 일본 외무성 동북아과장, 1980년에 일본 공안조사처, 1980년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에 직접 신군부를 찾아와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북한이 남침하기로 결정"이란 첩보를 준다.



"1980년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은 한반도담당 반장 에비스 겐지(夷子建治) 명의로 전두환 측에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제공했다. 한국 육군 정보참모부가 80년 5월 12일 작성한 '북괴 남침설 분석'에 따르면, 일본에서 온 첩보는 '북괴는 최근 한국 사태를 결정적 시기로 판단, 80.5.15~20 기간에 남침 결정, 김일성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소련 브레즈네프와 만났고, (브레즈네프와의 회담 때) 강경파 오진우 대동은 남침 계획 전제 추정'이라는 짧은 내용과 함께 '상기 첩보는 북경 당국이 일 방위청에 제보한 것으로 미국에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로 되어 있다."


- 한국국제정치학회가 2002년 발행한 <국제정치논총> 제42집 제3호에 수록.


이 첩보를 한국 육군참모본부와 미 CIA에서는 무시했다고 하는데... 김재규는 거사 이틀 전에 CIA를 방문했다. 그들이 나눈 얘기는 레짐체인지(정권교체) 였다고 한다. 그리고 육참은 체포된 정승화의 수하들 아닌가? 영화 서울의 봄에서 영웅으로 그려진 장태완은 사실 정승화에게 충성 맹세를 한 사람이다. 정승화의 체포 사유는 김재규와의 내란(시해) 공모 혐의였다. 장태완의 항전은 사실상 정승화 사수 작전이라고 봐야 된다.


10.26(박정희 시해)사건 때 가장 큰 의문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왜 거사 당일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를 향했는가? 일 것이다. 사람들은 판단 미쓰라고 하나 정승화를 부른 이유 자체가 육본으로 가기 위함 이였을 것이다. 김재규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앞세우고 정권을 장악해 군사혁명위를 내세우려고 했다. 자신이 위원장이 되고, 계엄사령관을 부위원장을 삼으려했다. 이후 본인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나서려고 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한심하게도 믿었던 김계원의 밀고에 의해, 정승화 지시로 체포된다. 그 후 정승화는 국무회의를 통해 계엄사령관이 된다.


김재규는 취조실 라디오에서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그 때 수사관들은 김재규와 정승화의 공모 사건이 확실하고 곧 계엄군이 취조실로 들이닥칠 것 같아 두려웠다고 했다. 김재규는 그 때까지만 해도 정승화가 사태를 수습하고 자신과 혁명정권을 만들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후 김재규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신나서 이야기 하듯 스스로 사건의 모든 정황을 자백했다고 한다. 이 진술은 이어질 12.12사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계엄사령관 체포를 군사반란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도 있다는 이야기다. 김재규 수사관들은 김계원과 같이 정승화를 유력 공모자로 보고 보고서를 올렸다. 이게 시해 7시간만의 일인데, 이 때 이미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건 억측이다.


 "정승화는 내 심복이다. 왜 그날 저녁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갔겠느냐? 당장 내일 아침이면 계엄사령관이 너희들 대장인 전두환을 적절히 조치할 것이다." (취조 당시 발언)




80년 5월 12일 밤에는 미군 순찰대가 비무장 지대에서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일이 일어났다. 이어 광주사태 이틀전인 15일에도 침투시도가 일어났고 조명지뢰가 터지면서 퇴각했다. 무장간첩은 1월부터 5월 초까지 육로 해상 등 다방면으로 4개월 동안 무려 10차례 침투했다. 이에 결국 5.17일 전국비상계엄령 전국확대가 실시된다. 이날 바로 김대중이 체포되어 수사받는데 이게 그 유명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김대중의 혐의는 한민통 의장직이 주요하다.


좌. 한민통 대회에 걸린 김대중 초상    우. 5.18당시 시민군이 내건 대중씨 석방이란 문구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은 조총련과 연계된 준 종북간첩조직인데, 이미 77년 간첩사건으로 반국가단체로 지정된 바 있다. 운동권 진영에서는 이를 유신정권의 공안조작 사건으로 치부하고 있으나,  나종향등 한민통 중앙위원 5명이 전향하여 "한민통이 북괴의 지령에 의해 조직된 것이며 활동자금은 거의 전적으로 북괴 및 조총련으로부터 받고있다"고 폭로한 부분은 현재까지 뒤집어 지지 않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한민통’의 지도부는 다양한 여러 조직들, 예컨대 ‘조국민주회복 남가주국민회의’, ‘재미민주운동연합’ 등 남한의 윤보선, 김대중 등 재야정치세력과 관련이 깊은 단체들을 흡수 통합하고자 하였다.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김사복이 한민통 핵심 관계자인 함석헌, 힌츠페터와 야산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도대체 우연히 만난 독일 기자라면서 어떻게 그 정신없는 와중에 소풍가듯 야산에서 밥을 먹을 수가 있단 말이지? 저건 아마도 5.18 당시가 아니라 사전 접선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일이란 거 아닌가? 김사복은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의 잠입을 도와준 장본인이다. 조사과정에서 문세광은 한민통 요원으로 밝혀졌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며, 문재인 정권 운동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 재밌다? 왜곡이 심하네. 그래도 유리하게 잘 꾸며놨다? 화려한휴가 - 택시운전사 - 서울의 봄으로 이어지는 현대사 배경 영화는 이대로 진실 역시 굳혀지길 바라는 386들의 믿음이 환원된 것 아닐른지.




서울의 봄은 철옹성 같았던 유신정권이 무너지며 초유의 권력 공백기가 생긴 위태로운 시간이였다. 갑자기 찾아온 무주공산에서 모두들 각자의 꿈을 꿨다. 김재규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집권하고자 했으며, 정승화 또한 최대한 추이를 관망하면서 기회를 엿본 것 같다. 전두환과 신군부 역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으며, 북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한 내 지하조직, 운동권, 노조를 총동원하고 간첩들을 대거 침투시켰다. 김일성은 조총련과 한민통을 통해 결정적 시기를 조율질 했으리라. 이들 중 누가 민주화를 꿈꿨나? 민주화는 각자의 욕망을 감추는 가면일 뿐이였다.


5공 때 국방장관을 지낸 윤성민은 2007년 국회에서 증언하길  


"…북괴는 혼란한 국내정세에 고무되어 대규모 기갑부대를 전방으로 추진 배치하고,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무력부 상황실에 나와 사태추이를 주시하고, 또한 인민군 총참모장 오극렬은 최전방인 개성에 나와있는 등 군사적 긴장상태를 고조시키고 있어 국내외적으로 국가안보와 국민생존권이 크게 위협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북괴가 곧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로 인해 건국 이래 최대의 난국을 맞게됨으로써…"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북한이 남침을 해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사실을 한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했다. 이 보다 앞서 5월 18일 발표된 미국무성성명은 "미국은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적 기도도 체결된 조약의 의무규정에 따라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3일 미 헤럴드 국방장관은 특별인터뷰를 통해 한반도에서 치열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두달동안은 그 전쟁을 수행할만한 충분한 전략물자가 준비되어 있다고 공언하면서 대북경고를 했다.


즉 좌익언론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남침 징후는 전혀 없었다란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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