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니까 청춘이지!
아주 호기롭게 휴학생활을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했던 이상적인 이야기들을 현실로 실현시킬 때였다. 휴학을 하면서 얻고 싶고 더 알아가고 싶은 것들을 '여행'이라는 컨셉에 맞게 목록화 해보았다. 예술, 세상, 사람 그리고 도전. Trip To Dreaming 이라는 개인 프로젝트의 이름을 짓고 줄여 'triming'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워드에 이 단어를 딱 쳤을 때, 단어에 밑줄 그어진 빨간색 선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냈다는 기쁨과 쾌감!
하고 싶은 것들을 줄 세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반면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생각해내는 일은 생각보다 괴로웠다. 그 때마다 나에게 한계치가 존재함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지금 할 수는 없겠다. 난 전공생이 아니잖아. 난 아직 이렇다 할 커리어가 없는 걸. 왜 이런건 죄다 서울에서만 하는거야? 아, 너무 돈이 많이 들 것 같은데.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될까? 대외활동, 인턴십, 서포터즈 활동들이 잔뜩 나와있는 여러 어플들을 뒤적거릴 때마다 내가 가진 한계들이 확대되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잠시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자면, 굳이 한계를 찾았던 것도 같다. 주어진 환경을 탓을 하는 일은 내 탓을 하는 것보다 더 쉬우니까.
휴학을 한 이상, 학교를 다니면서는 하지 못한 멋드러진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텅 빈 스케치북의 첫 번째 점을 찍는데 망설임의 시간이 참 길었다. 그래도 몸을 움직여야 생산적인 생각의 연료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아침에 일어나 영어 공부를 하고 헬스장에 가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머릿속에 주입했다. 세상을 공부하기 위해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갔지만 매번 큰 소득 없이 돌아오곤 했다. 내가 하는 행위들이 대체 무엇을 남길지, 잘하고 있는건지 고민하느라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끔은 아니 자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지 않은 과거의 나를 원망했다. 왜 이렇게 외면했어. 왜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 나 지금 이렇게 불안한데, 왜 도망쳤어.
어렵사리 쌓아 올렸던 희망과 긍정들은 다른 이의 우월한 성취를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인스타그램에서 보는 인플루언서들,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무언가 이룬 사람들, 비전공자이지만 다른 분야로 성공한 사람들의 영웅담. 이전에는 별 생각 없이 접했던 그들의 존재가 이제는 내가 당장이라도 쫓아가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정말 묘한 일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저 나에게 시간이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또 다른 성적표가 생겨났다. 그 성적표를 만들어내고 손에 쥐어준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이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동안 나를 가두던 알을 깨고 더 큰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은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불안함을 동반했다. 시간도 있고 여유도 있는 내가 왜 그들처럼 될 수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면 항상 고개가 숙여졌다. 나 또한 그들처럼 빠른 시일내에 결과로 보이는 무언가를 얻고 싶었다. 그들과 같아지려고 했다.
무한이 반복되는 의미 없는 고민들의 소용돌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내가 가여웠던 걸까? 우주에서 참 신기한 인연의 물꼬를 툭 던져줬다. 책방에서 만난 사람과의 우연한 동행 이후 나의 특기인 과감하고 도전적인 일들을 알음알음 해나갔다. 덕분에 다행히도 무사히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애꿎은 곳을 바라보며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았다. ‘애꿎은 곳’은 다른 게 아니라 '나의 이상향이 아닌 곳'이라는 의미이다. 시대의 흐름을 잘 활용하고 경제적 자유를 얻은 젊고 멋진 사람들을 훔쳐보며 출발선에만 멍하니 서있는 나를 책망하곤 했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굳이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 그냥 온전히 나다운 일들을 해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이 이루어가는 성취들을 SNS에서 볼 때마다 시기와 질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것을 하고 내 길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누군가 만들어둔 길을 탐냈나 보다. 아무래도 나의 소용돌이의 눈은 이 모순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사실 아직 나는 내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시간을 쪼개어 숨가쁘게 목표들을 실현하는 것이 맞는지, 흘러가는 대로 영감들을 주어가며 나의 것을 쌓는 것이 맞는지.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쫓아가야 하는 것인지,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지켜나가야 할지. 과연 답이 있는 질문일까? 고민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학교를 다닐 때도 불안했는데 휴학을 해도 불안하다니. 그런데 어쩌면 불안을 해결하고 싶다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 있겠다. 맞아, 나 불안해. 근데 불안하니까 청춘아니겠어? 아직 꿈꿀 것이,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일 테니까! 조급함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런거 모르겠다. 생각과 고민이 많은 나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순리인 것 같다. 그래도 난 계속 '나'로 살아가야 하니까, 이 불안들 역시 나답다고 여기고 진짜 내 이상향을 향해서 가야겠다. 헛발질은 이 정도면 됐다. 느려도, 당장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내 길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