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의 여행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제주에서의 생활은 로망이었다. 눈 덮인 제주대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니다 보면 저 멀리에 바다가 보였다. 캠퍼스에서 바다가 보이다니! 새하얀 눈과 푸른 바다와 캠퍼스 풍경은 절경이었다. 심지어 제주대는 학교 앞 떡볶이 가게에서도 바다가 보였다. 게다가 나는 운 좋게도 오션뷰인 기숙사 방이 당첨이 됐다. 커튼을 살짝 치면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아침을 열고 수업에 갈 준비를 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행운이었다.
제주에서의 나의 하루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오전 수업을 듣는다. 점심을 먹고 그날 기분과 날씨에 따라갈 곳을 정한다.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하고 카페나 맛집도 갔고 목장이나 오름에 가기도 했다. 매일 바다를 봤다. 1일 1 바다. 내가 바다를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몰랐다. 바다는 매일 봐도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그래서 정말이지 질리지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로망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데도 무언가 결핍되어 있음을 느꼈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그 커다란 물음표가 내 머릿속에 쿵하고 떨어졌다. 나는 매일 동기 두 명과 함께 다녔다. 그중에는 여름 방학에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았던 언니가 있었고 언니는 제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언니의 리드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니고 예쁜 풍경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동시에 내가 가고싶은 곳에 대한 선택은 계속 미뤘다. 언니가 나보다 잘 알고 있으니 그것을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치 다른 사람이 날 보는 것 같이 나와 지금 내가 있는 공간과 나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였던 순간이 있었다. 낯선 시선으로 내려다본 내 모습은 몸뚱이만 제주를 여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선택과 결정이 결여된 여행은 마치 빈 깡통같았다. '이곳에는 내가 없다' 깨닫게 된 순간, 깊게 잠들어있던 나의 주체성과 자아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내 여행을 해야겠다. 나는 다음날 동기들에게 선언했다.
때는 12월 30일. 한 해를 이틀 앞둔 아슬아슬한 날이었다. 여태껏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전이라면 도전이었다. 변화무쌍했던 나의 한해를 차분히 정리하고 싶었다. 조용히 사색하고 일기를 쓸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본격적으로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조용하고 소박한, 돌담과 마당이 있는 계좌의 작은 북카페를 찾았다.
혼자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새롭고 신이 났다. 나의 관심사는 오직 내가 좋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모든 관심의 초점이 나에게로 온전히 이동했을 때 나는 제주에서 가지고 다니던 그 결핍을 완전히 메울 수 있었다. 그때 느꼈다. 나는 제주가 아니라 나를 여행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고.
사실 제주에서 마음에 남아있는 기억은 다른 것보다 이런 순간들이다. 작은 카페에서 혼자 일기를 쓸 때, 바다 앞에서 한 참을 멍 때리며 과거의 나와 화해할 때, 새로운 해를 맞으며 나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넬 때 등. 전부 내가 나에게 온전히 몰입하고 기꺼이 나의 세상을 여행했던 순간이다. 나는 이날을 기점으로 종종 혼자 떠나곤 했다.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보러 가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요가를 하고 책방을 돌아다니며 갖고 싶었던 책을 찾아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아무런 제약 없이 떠올려 보니 그것이 곧 나의 색깔이자 정체성이었다.
'나로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나와 긴밀해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나에게는 나름의 방법이 있다. 먼저 나를 편안하게 하는 공간을 찾아보자. 다른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느라 항상 뒷전으로 밀렸던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와 공기를 담은, 그런 공간. 눈치 보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나만 있을 곳이니, 한껏 너그러워질 수 있다. 사람들과의 연락은 최소화해보자. 'Trip To Me'에서는 자발적으로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그러다 보면 타인이 사라진 내 하루에는 이렇게 공백이 많구나 느끼곤 한다. 그 공백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궁금한 대상이 생긴다. 바로 나. 항상 남에게 기울였던 관심과 질문들이 슬며시 나에게로 향한다. 그것은 생소할 수 있지만 반가운 생각의 물꼬다. 요즘의 나에 대해 생각해봐도 좋고 나의 역사를 들춰봐도 좋다. 그리고 딱 지금에만 할 수 있는 기록을 하는 것도 추천한다. 나는 구좌의 카페에서 사장님께 볼펜을 빌려서 '2021년의 끝에서'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썼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날의 일기를 다시 들춰볼 때마다 투박한 펜 때문에 뭉특하고 잉크가 여기저기 세어버린 글씨들에서 그때의 향수를 느낀다. '나로의 여행'에서 꼭 자신의 기록 한 움큼을 가져오길 바란다. 또, 길을 잘못 찾거나 버스를 반대로 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자책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겠지만 그 마저도 나밖에 모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자. 재미있든 부끄럽든 우울하든, 나만 아는 나와의 추억이 쌓인다는 건 보물 같은 일이다.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진다면 아주 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다움은 그런 시간들을 먹으며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