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에서는 이게 중요해요! 어라?
제주에서 이룬 버킷리스트가 몇 가지 있다. 혼자 여행 다니기, 바다 보면서 요가하기, 명상 수업 듣기 등. 서핑도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의욕은 넘치지만 유감스러운 수영 실력인지라 바다에서 물을 먹기 바쁘지만, 파도를 타는 짜릿함이 어쩐지 상상이 갔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를 힐끗거리는 건 나에겐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서핑의 성지라는 제주 중문 색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서핑은 준비를 하는 순간부터 쉽지 않았다. 서핑을 할 때 입는 웻 슈트는 기능이 탁월한 탓인지 입는 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다리 한쪽을 넣는 순간부터 강하게 조여와서 이걸 과연 다 입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본격적으로 서핑을 하기 전에 안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파도라는 매개를 가지고 하는 스포츠이다 보니 체험자들의 각별한 주의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특히 보드로 주변 사람을 헤치지 않기 위해 항상 보드를 자신의 옆에 두어야 한다. 보드를 옮기는 자세, 손의 위치 등 이런저런 정보들이 쏟아졌고 길어지는 강의에 집중력이 살짝 흐려질 때쯤, 강사님의 말이 나를 잔잔히 몰입시켰다. 똑똑. 영감이 찾아왔어요.
그때, 그 말이 비단 서핑에만 해당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인생도 그렇지. 목표와 방향은 저 앞에 있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힐끗거리곤 한다. 과거가 후회되거나 미래가 두려워서, 정작 바라봐야 할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앞이 아닌 다른 곳을 보면 그 방향으로 빠지는 서핑의 원리처럼, 살아가다 보면 비슷한 일이 종종 있다. 밀려오는 파도가 무서워 뒤를 계속 돌아보는 일과 미래에 닥칠 일들을 미리 걱정하는 일. 앞을 보지 못하다가 바다에 풍덩 빠지는 일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몰두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 파도를 타는 일과 삶을 사는 일. 두 가지를 살며시 겹쳐보니 언뜻 비슷한 색이 보였다.
보드 위에 올라서면 겁이 난다. 일단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내 몸뚱이, 언제 올지 모르는 저 파도, 어떻게 움직일지 감도 안 잡히는 이놈의 보드 때문에 말이다. 보드 위에서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자세가 흐트러지는 이유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두려움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방어 동작들이 오히려 파도를 넘는데 장애물이 된다. 종종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걱정과 고민들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걱정의 뿌리를 잘라내기 어렵듯이 보드 위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팔을 쭉 펴고 일어서는 것도 쉽지 않다. 불타는 열정으로 시키는걸 그대로 해서 그런지, 나는 운 좋게 첫 파도를 잘 넘겼다. 몇 번 잘 넘기니 의기양양 해졌다. 나 좀 잘 타나? 생각했는데, 그러다 풍덩- 완전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졌다. 강사님의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아이코. 운 좋은 몇 번의 성공 덕에 받았던 엄지 척과 박수를 의식한건지 내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나 보다. 한 번 시원하게 빠지고 나니 금세 처음의 감각을 잃었다. 내가 어떻게 일어났더라? 자, 다시 다시. 앞을 보자. 힘을 빼고. 머릿속에 주문을 걸었다. 안 되면 다음에 또 하면 돼. 아직 할 시간 많잖아. 그렇게 되뇌니 몸에 들어간 힘이 풀리고 이리저리 향하던 시선이 정돈됐다. 보드와 몸이 물결을 넘기고 신호와 함께 몸을 재빠르게 일으켰다. 두려움을 없애고 마음가짐을 장착하고 앞을 봤다. 성공!
삶에서도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스스로의 기대치에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살피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내가 지나치게 긴장한 채 살고 있지는 않나? 이런저런 걱정으로 항상 미간에 바짝 힘을 주고 있나? 이따금씩 물어보는 것이다. 몸과 생각에 살짝 힘을 빼면 파도의 굴곡을 섬세히 느낄 수 있듯이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은 것도 같다. 언제나 주름져있는 미간의 힘을 조금만 푸는 것. 경직된 몸과 마음에 조금의 여유를 주는 것. 하늘이 예뻐서, 길가에 핀 꽃이 예뻐서 대가 없는 미소를 지어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진정 집중해야 할 '앞'을 보는 것. 인생에서의 '앞'은 지금의 행복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결국 행복을 위해 살아가니까. 시선은 항상 앞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엄한 곳에 풍덩 빠지지 않게.
조금 더 힘을 빼고 앞을 보며 나아가는 그 순간이 나와 모두에게, 각자의 속도로 가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