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월 나무 Oct 28. 2022

역사를 대하는 시각이 담긴  서술 장치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읽고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주변 세계에 영향을 미쳐온 한 문명의 종말로 이어지며 세계사를 바꾼 인류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 비잔틴 제국은 영토면에서는 투르크에 포위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서유럽 해상무역국가들(베네치아, 제노바 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19세에 술탄이 된 메메드 2세가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를 온건한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 야심가 메메드 2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할릴 파샤에게 ‘내가 그대에게 받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저 도시를 나에게 주시오.’라고 말하며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투르크와 비잔틴 간의 상호불가침 조약이 갱신되었음에도 위험을 감지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메메드 2세 즉위 후 한 달 만에 서유럽 세계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정치,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적절한 시기에 원군이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황제도 이미 천 년을 이어온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현저한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53일을 버텨낸 천 년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막강한 재력과 전쟁을 위한 지략을 총동원한 메메드 2세에 의해 결전 끝에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천 년간 중세의 암흑시대에 있었던 서유럽으로 동로마 제국의 과학과 기술, 문화가 전파되면서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오스만 투르크가 걸프해, 홍해, 지중해 등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당시 서유럽 해상무역국가들의 물류길이 막히자 이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대항해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인류는 중세가 마감되고 합리와 지성과 과학의 근세가 시작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 두 주인공이었던, 위엄 있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와, 젊은 야심가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국가, 종교, 직업, 나이, 정치와 경제적 가치관과 처한 입장이 다른 당시 현장의 증인들이 차례로 소개된다.

*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 :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비잔틴 황제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함대의 해군 제독. 침착하고 냉정하며 인간미를 가진 인물
* 니콜로 : 의사,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 함대의 선의. 후에 ‘콘스탄타노플 공방전 일지’를 씀
* 자코모 테탈디 : 고전문명이나 가톡릭과 그리스 정교의 연합 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피렌체 출신의 상인. 테탈디가 프랑스인에게 전한 콘스탄티노플 대함락이 프랑스어로 쓰여져 후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사료가 됨
* 미하일로비치 : 기독교 국가인 세르비아 기병대 지휘관으로 술탄 메메드 2세의 원군 파병 요청으로 이교도인 오스만 투르크를 돕게 됨. 1455년 술탄의 세르비아 남부 침공으로 포로가 되어 예니체리 군단(투르크의 최정예군)에 있다가 헝가리 군에게 항복한 틈을 타서 기독교로 개종. 후에 폴란드에서 ‘회상록’을 씀
* 게오르기오스 : 수도사, 가톨릭 교회 중심의 통합은 그리스 정교를 사라지게 할 것이므로 동서교회 연합 방식을 찬성하지 않음. 메메드 2세의 요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대주교가 됨. 후에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관하여-신앙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씀
* 우베르티노 : 그리스 철학, 언어를 공부하는 유학생. 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씀.
* 안젤로 로멜리노 : 갈라타에 있는 제노바 거류구의 행정관, 투르크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음
* 프란체스 : 콘스탄티누스 11세 신봉자, 황제의 현 상황과 처지를 안타까워함. 후에 수로사도 삶을 마감했으며 ‘회상록’을 씀
* 투르순 : 순수 투르크 혈통의 시동, 메메드 2세와 상호 총애와 신임을 함. 후에 ‘정복왕 술탄 메메드의 역사’를 씀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고대 로마가 자기 세계의 모태라 생각하던 서유럽인에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로 인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기록은 다가올 변혁을 생각하는 냉정하고 정확한 것보다 상실한 것에 대한 애석함을 표현한 감정적인 시나 보고가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세계사의 대전환점이 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과정이 다소 차분하고 담담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의아했다. 마치 국가, 종교, 직업, 나이, 그리고 정치, 경제적 가치관과 처한 입장이 다른 여러 명의 주인공이 관찰자적 시점에서 전개하고 있는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에필로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저자는 위에서 소개한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이 남긴 저서를 바탕으로 각각 그들의 입장과 시선으로 콘스탄티노플 함락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작가만의 서술방식(장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등장인물 몇 명의 저술을 참고로 그들의 시각에서 전개하려고 했다고 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술된 역사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자 한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국가, 종교, 직업, 나이, 정치, 경제적 가치관과 처한 입장이 다른 등장인물들의 저술을 바탕으로 쓰였다는 점, 무엇보다도 작가가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사건을 바라보고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좀 더 객관적 시각이 담긴 역사서라고 생각됐다.


 역사에서 기록은 매우 중요한데 누가 어떤 관점에서 기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역사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하려고 노력하지만, 주관적인 관점과 판단이 배제되어 기록된 역사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저자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겨있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작가의 특별한 서술적 장치로 잘 드러난 책이라고 여겨졌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쟁에 관해 대화를 주고받던 중 한 지인이 ‘전쟁은 국립공원에 주기적으로 불이 나고, 그 화로 생태계가 나름대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과 유사하다’라고 한 말과, 조지 프리드먼의 ‘전쟁은 인간이 교훈을 못 얻어서도 아니고, 어리석어서도 아니며,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인해 지식과 문화의 교류와 융합이 일어났고, 새로운 지식과 문화가 탄생했던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전쟁을 대신해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전쟁은 인간의 욕망(야욕)을 채우는 것 외에 어떤 의미로 역사에 기록될까?



매거진의 이전글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