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어머니께서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코로나 때문에 병원을 방문하는 것도 여의치 않던 때, 어머니께 자주 전화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매일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어머니의 마음이 큰 언니와 오빠에게 더 많이 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나름대로 어머니께 잘해 드리려고 노력하는데, 어머니의 마음은 나와 같지 않다는 생각에 섭섭했다. 나에게 첫째인 딸과 둘째인 아들은 누가 더 귀하고, 누가 더 믿음직스럽고가 없다. 딸, 아들 구별도 없다. 늘 둘을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나로서는 나보다 큰 언니나 오빠를 더 의지하시고 귀해하시는 어머니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마 전에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제법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어서 어머니의 겨울 옷을 준비해 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나오려는데, 어머니께서 이제 당신은 쓸 일이 없는 것이라며 필요한 딸들이 나누어 갖으라고 하시며 쇼핑백을 하나 건네셨다. 집으로 오기 전에 큰 언니가 사시는 곳으로 가서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오래된 듯한 손수건 2장과 내복, 그리고 낯익은 어머니의 옷들이 쇼핑백에 담겨 있었다.
“아이고, 이거 내가 20년 전 쯤에 엄마께 드린 손수건이네. 이건 삼사 년 전에 사 드린 내복인데 입지도 않으셨고. 이걸 왜 다시 다 주시는 건지… 내가 다 가져가서 쓰고 입을란다.”
어머니를 향한 짠한 마음이 담긴 말을 남기시고, 큰 언니는 어머니께서 주신 쇼핑백을 들고 가셨다. 다음 날 같이 나들이를 가기로 해서 다시 만난 큰 언니의 얼굴이 푸석했다.
”어? 얼굴이 피곤해 보여요. 어제 못 주무신 거예요?”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잤다. 엄마가 주신 손수건을 보니 잠이 오지 않더라. 마지막 정리하는 마음으로 물건들을 챙기셨을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도 나고… 밤새 엄마가 살아오신 날들을 생각하며,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쓰고 또 쓰며 울고… 그래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샜다….”
어머니께 큰 언니와 나는 같은 자식일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머니의 쇼핑백을 보며 나도 마음이 찡했지만, 잠시였다. 그런데 큰 언니께서는 어머니의 손수건과 내복, 그리고 입으시던 옷들을 보며 어머니의 지난 삶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서 어머니께 큰 언니는 딸이면서도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었나 보다. 어쩌면 어머니께 큰 언니는 삶의 애환을 같이 해 온 벗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와 큰 언니는 나보다 14년 세월을 더 함께 했고, 오랫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하셨던 아버지를 돌보시는 등 가정의 대소사를 같이 겪으며 헤쳐 나가신 동지같은 사이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께 큰 언니는 당신의 고단한 삶을 함께 해 준 남다른 자식이고, 큰 언니께 어머니는 평생 농사일과 김 양식을 하시며 6년 1남을 키워 내시고 힘든 삶을 살아온 애잔한 연민의 대상인 것이다. ‘자식이라고 다 같은 자식은 아니다.’라는 말이 마음으로 이해되었다.
늦게 결혼을 하신 부모님께 큰 언니는 3년을 기다리다 얻은 귀한 딸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선호하던 그 시절이었지만 큰 언니는 첫째로서 부모님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둘째도 딸이라 부모님을 둘째 언니의 이름을 ‘후남이류’와 같은 이름으로 지으셨고, 바람대로 셋째는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을 더 원하신 부모님께서는 내 이름도 ‘후남이’류의 이름을 지으셨지만, 우리 집에 더 이상의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은 6녀 1남이 되었다.
큰 언니께서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얇은 창호지로 옅게 겨울 햇빛이 들어왔지만, 창문도 없는 시골집 방은 좁고 답답했다.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부모님은 남동생을 애지중지하셨다. 귀한 아들이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봐 부모님께서는 여섯 날 나에게 남동생을 맡기시고 밖에서 어제 채취해 오신 김을 가공하고 계셨다. 동생을 등에 업고 방안을 서성거려 보았지만, 열 걸음도 채 안 되는 방에서 나는 너무 심심했다. 참을 수 없어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를 지그시 눌렀다. 내 손가락 크기만 한 구멍이 뚫리고, 창호지에 난 구멍으로 바짝 눈을 갖다 댔다. 창호지 구멍보다 조금 더 넓은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 동안 김을 널려고 쳐 놓은 발들로 마당도 나누어져 있어서 좁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방안보다 밝았고, 겨울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맏이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큰 딸은 살림 밑천이다.’는 옛 말이 있다. 사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큰 언니는 여섯 살 때부터 동생들을 돌봤고 집안 일도 했다. 아직 마을에 공동수도도 없던 시절이어서 뒷산에 올라가 물동이에 물을 받아서 이고 와야 했다고 한다. 반농반어의 섬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일을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조금 과장해서 대여섯 살 무렵이면 누구나 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살던 섬마을에서는 그랬다. 봄, 여름, 가을에는 농사 일을 하고, 겨울에는 김 양식을 해야 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그 많던 일들, 한 권의 책으로도 다 열거할 수 없다. 우리 7남매 중 그 일들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당연히 맏이인 큰 언니였다. 농작물의 씨를 뿌리고, 밭에 난 잡초를 뽑고, 때가 되면 추수를 하고, 중학생 때는 물이 정강이까지 오는 논에 들어가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황인데도 농약통을 지고 농약을 뿌린 나였지만, 큰 언니께서 한 일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나는 많은 일들을 피해 갈 수 있었으니까.
큰 언니와 막내의 나이 차이는 무려 18살이다. 어머니는 농사 일과 김 양식 등, 바다 일로 항상 바쁘시니, 어린 동생들을 건사하는 것은 늘 큰 언니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동생들 일이라면 지겨울 법도 한데, 동생 네 명이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기 전까지 잠시 큰 언니 집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동생들의 빨래며 식사를 챙겨 주셨다. 그리고 동생들이 결혼을 하겠다며 배우자와 함께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갈 때에도 부모님께서 사시는 시골집보다 큰 언니 집을 먼저 방문했던 것 같다. 사시사철 분주한 부모님은 사위나 며느리를 시골의 부모님 댁보다 도시에 사는 큰 언니 집으로 먼저 오게 했다. 동생들의 결혼 준비를 도와주는 것도 어머니가 아닌 큰 언니가 도맡아 하셨다. 큰 언니는 동생들이 결혼을 한 후에도 동생들의 가정사에 늘 관심을 갖고 마음을 보태주셨다. 돌이켜보니 형제자매의 애경사를 대하는 큰 언니와 나의 마음이 달랐음을 이제야 알겠다.
국민학교를 가기 전 호롱불 아래에서 나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참 잘한다, 똑똑하다’며 나의 자신감을 키워 주신 큰 언니였다. 윤기 자르르 흐르던 계란 프라이를 처음 먹어 본 곳도 조카가 갓 태어난 큰 언니의 신혼집에서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와 대입 상담을 해 주시고, 내 남편에게 따뜻한 첫 끼 식사를 마련해 주신 분도 큰 언니였다. 서울로 첫 발령을 받아 떠나는 날, 2월 말이라 아직 쌀쌀한 이른 새벽에 큰 언니는 돈 오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때 내 첫 월급이 30만 원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공무원이셨던 형부 월급에 5만 원은 큰돈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를 눈물로 배웅하시던 언니의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때로는 나이 드신 어머니와 여섯 동생의 살아가는 일들로 큰 언니의 마음이 분주하실 때도 있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일들을 살뜰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시되,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맏이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은 이제 내려놓으셨으면 좋겠다. 가볍게 일곱 남매 중 한 분으로 함께 하셨으면 좋겠다.
우리 6녀 1남의 맏이인 큰 언니는 나에게 언니이자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