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29일 차 - 인과관계의 망상?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by Homo ludens

[인과관계의 망상]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창백한 범죄자'는 자아(Ich)의 능력, 즉 이성을 뜻합니다. 차가운 이성은 자신의 뜻대로 신체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이성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고, 생각과 행동이 인과성에 의해 시간적 선후관계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까요?


그러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표상은 별개의 것들이다. 이들 사이에는 인과의 바퀴가 돌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을 한 행동의 행위자로 간주해 왔다. 나는 그것을 망상이라 부른다. 그에게는 예외적인 것이 본질이 되고 만 것이다.

니체는 원인과 결과의 허구성을 비판합니다.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은 하나의 원인에 대한 무수한 결과가 존재하듯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나비효과'와 같이 하나의 원인이 파생시킬 수 있는 결과는 예측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원인'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결과가 나온 이후의 분석에 따른 결과의 결과입니다. 경제의 흐름과 국제정세에 대한 수많은 전문가들이 하는 역할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분석입니다. 분석을 통해 가능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던져줍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언제나 빗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들의 분석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다양한 이유의 후보들을 추려내는 일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역설은 우리가 분석이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인식의 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도 결과의 유일한 원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니체는 행동에 대한 원인이 생각이라고 믿는 우리의 믿음을 '망상'이라고 비판합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을 '자아(Ich)'라고 여기며 우리 스스로를 자신의 생각에 가둡니다. 나의 생각의 능력은 나의 미래를 예측하기에 늘 부족합니다. 심지어 내일 내가 입을 옷과 먹을 음식조차 바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의 기분과 감정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기 십상입니다. 또한 "왜 그랬습니까?"라는 질문에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라며 스스로의 결정에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별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에 생각이 따라붙고, 그것이 다시 행동에 영향을 주고, 다시 생각하는 순환의 과정으로 우리의 하루가 그려지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인과성은 차라투스트라가 지적하듯 '예외'적입니다. 예상할 수 없는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나의 세계를 넓혀주는 자기(Selbst)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한 가닥의 금을 그어 암탉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둘 수 있다. 그가 그은 금은 그 자신의 가련한 이성을 꼼짝 못 하게 잡아둔다. 나는 이것을 행위 이후의 망상이라고 부르노라.

성체 코끼리는 새끼 시절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충분히 강해진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실패에 대한 익숙함이 스스로에게 실제의 족쇄보다 더 강력한 정신의 족쇄를 채웁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을 지적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받아들여 내가 모르는 나를 탐험하는 일은 이성에게는 벅찬 임무입니다.


보라, 이 가련한 신체를! 그가 무엇으로 인해 고뇌했으며 무엇을 갈구했는지를 이 가련한 영혼이 자기 나름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것을 살인의 즐거움으로, 또 비수의 행복에 대한 욕망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비수의 행복'입니다. 비수는 파괴적이고 잔인한 행위를 뜻합니다. 이성은 원인을 파악하는 능력을 통해 탓하고, 비난하고, 죄책감을 주는 등의 공격적인 도구로 사용됩니다. 모든 것은 명백하게 이해되고, 어떠한 의심도 없이 책임은 추궁됩니다.

한때는 의심이, 그리고 자기 지향적인 의지가 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만 해도 병든 자는 이단이 되고 마녀가 되었다. 그런 자는 이단과 마녀가 되어 고뇌했고, 고뇌하도록 만들려 했었다.

명백한 이성의 결단에 의해 '의심' 자체가 신성모독이 됩니다. 의심하는 자는 이성이 결여된 자로 취급됩니다. 따라서 이성의 논리에서 벗어난 자는 명백한 이단과 마녀로 분류되는 폭력적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이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또 다른 '명백한 이성'이 되어주기를 거부합니다.


나 진정, 저들의 망상이 진리, 또는 성실, 또는 정의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저들은 오래 살기 위해, 그리고 가엾은 자기만족 속에서나마 오래 살기 위해 자신들이 지닌 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급류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난간이다. 누구든 잡을 수만 있다면 나를 잡아도 좋다! 그러나 나 너희를 위한 지팡이는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자신은 구원자가 아닌 도우미일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지팡이를 구입하여 세발로 걷는 것이 아닌, 두 발로 걷다가 힘들 때만 잠시 팔로 난간을 붙잡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의 고뇌를 이해합니다. 그들의 망상이 '자기만족'임을 이해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좌절에 빠진 자들이 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일시적 도움을 줄 뿐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용기를 내어 나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몫입니다.


<No. 5>, 잭슨 폴록, 1948

미국의 예술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는 기법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추적하여 다음 움직임을 가져갑니다. 그의 그림을 시초에 결과를 정해두지 않았고, 이성은 이전 행동과 다음 행동 사이에서 작품이 예술가의 의지를 벗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폴록은 예측하지 못하는 충동적인 혼돈을 직접 들여다보기를 원했습니다. 그곳에서 발견하는 생명력을 캔버스로 고스란히 옮겨오기 위해 이성을 최소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술가도 작품과 친숙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일종의 "친숙해지는"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제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알게 됩니다. 그림을 바꾸거나 이미지를 망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림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림이 드러나도록 두려고 노력합니다. 그림과의 접촉을 잃었을 때만 결과물이 엉망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수한 조화, 자연스러운 주고받음이 있고, 그림은 좋은 결과를 냅니다. - <나의 그림>中, 잭슨 폴록, 1947 -




*1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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