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에 있는 나무에 대하여>
젊은이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깨우침은 젊은이의 시샘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를 듣고 그를 쫓고 있으며, 언제나 그 격차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과연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가 느끼는 타인과의 비교에 의한 불행에 대해 어떤 답을 줄까요?
너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그 추구가 너로 하여금 밤을 지새우게 했으며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만들었겠다.... 너는 아직 자유를 꿈꾸고 있는, 갇혀 있는 자에 불과하다. 아, 이처럼 갇혀 있는 자의 영혼은 영리해지기 마련이지.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추구합니다. 역사적으로 '자유'를 추구했고, 그것을 쟁취하여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쟁취한 것은 '자유'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상태를 현실에서 성취하는 것이 역사적 사건들에서의 '자유'의 쟁취과정입니다. '자유'를 꿈꾸는 것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부자유'에 대한 반항일 수 있습니다. '자유'는 그것을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 저항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유'에 대한 반발로 추구하는 '자유'는 '부자유' 상태에서 생긴 각종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자유'는 또 다른 정화를 통해 '부자유' 상태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합니다.
정신의 해방을 쟁취한 자는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아직도 허다한 감옥과 곰팡이가 그의 내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눈 또한 깨끗해져야 하고. 그렇다, 나 네가 처한 위험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사랑과 희망을 걸고 간청하노니 너의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말라!
부유한 지주에게 핍박을 받던 노예가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면, 그는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자유'는 자신을 구속하려고 했던 '부자'에 대한 복수로 이어질 위험이 굉장히 큽니다. 하지만 핵심은 노예제도가 가진 사회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부자' 혹은 '지주'라는 집단에 대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 본질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분노와 복수의 대물림을 할 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랑과 희망'을 촉구하며 '자유'로운 정신을 얻은 이후 '깨끗한 눈'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세우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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