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전시 가이드 3부
경주를 거쳐 부산문화회관 전시실에서 2024.07.02 - 10. 27까지 이어지는 전시의 모토는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이다.
V. 인상주의를 중심으로
VI. 인상주의 이후
VII.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VIII. 20세기 컨템포러리 아트
IX. 20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술 현장
VI. 까지 인상주의가 뿌려놓은 새로운 시도들을 알아보았다. 인상주의와 인상주의 이후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시도는 예술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해 주었고 카메라의 발명 이후 재현 예술로서의 회화가 맞이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대한 예술가들 각자의 해답을 이끌어냈다.
아방가르드는 군사용어로 avant '~앞에' + garde '보호, 보관'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전위'라고 번역되어 아방가르드 예술은 '전위 예술'로 불린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의 물결의 최전선에 서서 기존 예술을 옹호하던 미술계의 관습적이고 방어적 태도와 부딪히고, 때론 심한 비판과 비난을 겪어야 했다. 전통적 예술을 옹호하던 이들에 대항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전통적 시각의 사각을 찾아 나섰다. 지나친 상업주의를 비난한다면 상업주의적 예술을, 구상적, 형식주의적 예술을 옹호하려 한다면 추상적, 비형식주의적 예술을 시도했다. 이러한 기존의 틀로부터 해방되려는 시도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발전을 거듭한다. 변증법적 발전이란 헤겔의 "지양(Aufhebe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지양"은 '보존'과 '폐기'를 동시에 지닌 개념으로 헤겔은 역사 발전을 '보존'과 '폐기'를 통해 새로운 '합(Synthese)'으로 이행한다고 이해했다. 예술에서 한번 시도된 모험은 안정기에 접어들자마자 또 다른 도전을 받아들여야 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새로운 예술에 대한 도전정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이 과거의 어떤 부분을 폐기하고 보존하려 했는지 찾아볼 수 있다.
피카소의 작품에서 입체파가 처음 발견된 작품은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고전주의 예술에서 끊임없이 갈고닦았던 투시도법과 단축법을 지워버리려고 한 피카소의 노력이 보인다. 피카소는 이를 위해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정면성의 원리'를 다시 되살린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마스크에서 사용되던 기하학적 얼굴 표현들을 차용해 왔다. 하지만 그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소실점에 대한 습관은 여인들의 팔의 각도가 화면의 아래쪽 중심부로 향하는데서 발견된다. 고전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그의 새로운 미술에 대한 시도에 자극을 준 것은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이다. 세잔의 유고 전에서 그의 작품들을 본 피카소는 배경과 사물을 기하학적 모티브로 환원하고자 한 세잔의 시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이차원의 한계에 머물렀던 회화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피카소의 시선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기하학적 입방체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꿈>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를 멈추고 '아는 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물의 보이지 않는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측면을 이리 알고 있다면 그것을 없는 척 그리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 이것은 카메라의 발명 이후 화가들이 내몰린 직업적 위기에 대한 해결법이기도 하다. 화가의 정확한 재현 능력은 기계적 재현 능력을 쫓아가기에 한계가 분명하다. 따라서 화가는 카메라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려야 했고 피카소와 입체파 화가들이 제시한 회화적 해답은 한 공간에 여러 관점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었다.
피카소와 다소 다른 방식의 입체파를 시도한 이들도 있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알베르 그레이즈와 장 메쳉제의 입체파는 깨진 유리면에 비친 모습과 같이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의 시도를 '크리스털 큐비즘'이라고 부른다. 메쳉제는 이 시기를 "단순하고 견고한 예술로의 회귀"라고 불렀다.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크리스털은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크리스털은 빛을 굴절시키고 굴절된 빛을 다시 합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견은 뉴턴의 "광학(optics)"에서 증명된 것(프리즘)으로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예술에서도 적용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과학적, 실험적인 태도가 입체파 화가들에게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드디어 모네에서 시작된 새로운 미술로의 실험이 앤디 워홀에 이르게 되는 부분에 도달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여러 시도는 전통적, 관습적 예술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업적을 통해 예술은 예술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예술인가?", "누구의 예술인가?".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부른다. 그야말로 '모더니즘 이후(post)'의 예술이라는 의미로 그 자체로는 규정성이 없는 명칭이다. 독일의 철학자 볼프강 벨쉬(Wolfgang Welsch)는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unsere postmoderne Moderne)>(2008)을 통해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계승하면서도 모더니즘이 갖지 못한 '다원성'을 추구한다고 분석했다. 해당 관의 이름 '컨텀포러리 아트(contemporary)'는 '~와 함께'의 뜻을 가진 접두어 con에 시간을 나타내는 tempus의 합성어로 '동시대의 예술'이라는 뜻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시대의 예술을 총칭하는 말로 여전히 포스트 모던적 예술과 아직 정의되지 못하거나 인식되지 못한 새로운 예술을 모두 포함한다.
회화에서 초상화는 매우 중요한 장르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의 내면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16세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 티치아노는 대주교 아르킨토의 초상화에 투명한 커튼을 추가했다. 티치아노는 아르킨토의 삶을 초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다. 1554년에서 1556년 사이에 아르킨토는 베네치아에서 교황 율리우스 3세를 대신할 만큼 권력을 쥐었다. 이후 등장한 교황 바오로 4세는 그를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승인한 이 임명은 밀라노의 스페인 총독 후안 데 폰세카에 의해 저지되어 아르킨토는 명예로운 대주교 취임을 기다리다 숨지고 만다. 티치아노는 빛바랜 아르킨토의 영광을 드리워진 커튼으로 표현했다.
벨라스케스가 남긴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은 초상화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티치아노의 아르킨토를 적용한다. 교황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커튼을 베이컨은 사람의 내면을 투시해서 바라볼 수 있는 엑스레이(x-ray)처럼 이용한다. 교황의 실체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위기에 처한 고통과 고뇌에 울부짖는 한 인간이다. 그의 권좌는 마치 철창과 같이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감옥처럼 작용했다.
베이컨은 스스로 밝히듯 자신의 작품이 특정 범주에 분류되기를 거부했다. 다만 그는 "사실의 잔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그의 <남자의 초상에 관한 연구>를 보면 마치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에 등장하는 여러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베이컨은 1920/30년대 피카소의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피카소가 입체파로서 신체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과는 다르게 베이컨의 신체 재조합은 기괴하고 추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오른쪽 눈에 보이는 검은 구멍은 마치 죽은 자의 해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가 그린 이 남자가 어떠한 "사실의 잔혹성"을 겪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삶의 잔혹성"으로 그의 내면에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면 두 가지 비예술적인 것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만화로 예술의 장르에 속할 수 없었던 지나치게 대중적인(pop)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신문 광고로 철저하게 소비자본주의적 미디어였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리히텐슈타인은 앤디 워홀과 마찬가지로 팝아트(pop-art)를 이끌었다. 그는 소비자 중심의 일상적 현상에서 예술이 분리되어 있는 것을 비판했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의도에 따라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제작되어야 했고 그는 스크린 인쇄와 목판 인쇄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전시된 <Crak!>은 DC Comics에서 출판한 만화 <Star Spangled War Stories>의 102화에 등장하는 장면을 재구성하여 만든 작품이다. 여기에서 미술의 전통을 깨는 또 하나의 요소인 말풍선을 사용한다. 화가는 그림에서 알레고리(우화)와 상징 등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메시지를 숨겨 전달한다. 하지만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에서 사용하는 말풍선을 사용해 있는 그대로 메시지를 적어낸다. <이제, 내 아이들아... 프랑스를 위하여!>
미술사에서 문자를 그림에 넣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에는 <수태고지> 장면에서 흔히 공기 중을 떠도는 문자열을 볼 수 있었다. <AVE MARIA, GRATIA PLENA, DOMINUS TECUM> (마리아여, 은총 가득하여 신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고지하는 마리아의 처녀 잉태는 문자와 그림의 혼합으로써 신성한 메시지를 드러낸 상징적 문구다. 또한 하지만 여기서 리히텐슈타인은 "CRAK!"과 같은 의성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 없는 메시지는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는 전혀 다르다. 마그리트는 여기서 존재와 지시성의 관계, 즉 시니피에(signifié)와 시니피앙(signifiant)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이프의 본질과 그림 속 파이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회화에서 주된 목적으로 삼았던 "재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리히텐슈타인에게 이러한 진지함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에게 미술에 드러난 것은 미술을 존재하게 하는 것, 즉 소비재로써의 미술보다 중요하지 않다.
앤디 워홀 역시 리히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소비와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제시했다. <요셉 보이스>에서 가운데 흑백의 사진을 두고 왼편과 오른편에 '네거티브' 효과를 사용한 이미지를 배치한다. 그는 이러한 반복된 이미지를 통해 대상을 '아이콘'화 한다. 그에게 요셉 보이스는 당대 미술의 '아이콘'이었고 대중에게 잘 알려진 소위 '스타'들의 아이콘화를 자신과 동시대의 미술가를 표현함에 있어서 그대로 사용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1979년 독일에서 만났고 그에 대해 한 비평가는 "마치 아비뇽에서 두 라이벌 교황이 마주한 것 같은 아우라"가 감돌았다고 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마릴린 먼로>는 그녀의 이미지를 다양한 색채 변경을 통해 복제했다.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당시 단돈 250달러에 팔렸다. 마릴런 먼로가 죽은 1962년으로부터 5년이 지나 만들어진 이 작품은 한 개인으로서의 먼로가 아닌 20세기 대중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Icon'을 그려낸 것이다.
먼로와 함께 <캠벨 수프 캔> 역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이제 회화의 대상이 신, 위인, 풍경, 일상적 삶, 유명인을 넘어 대량 생산품인 통조림 캔에 이르렀다. 하지만 워홀의 태도는 분명했다.
<이 나라의 좋은 점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소비자가 가장 가난한 소비자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TV를 보면 코카콜라를 볼 수 있고, 대통령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리즈 테일러가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것을 알고, 그냥 생각해 보세요. 당신도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콜라는 콜라고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구석에 있는 찌그러진 엉덩이가 마시는 것보다 좋은 콜라를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코카콜라는 똑같고 맛있습니다. 리즈 테일러도 알고, 대통령도 알고, 엉덩이도 알고,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형편없는 예술, 쉽게 만든 예술인 듯 보이는 앤디 워홀의 작품은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해답으로 내놓은 것이다. 예술은 소비되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서양미술의 역사는 그림의 대상이 왕과 신에서 부자와 고귀급 인사로, 일상적 삶의 모습과 풍경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그림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 역시 소수에서 다수로 변해갔다. 앤디 워홀은 예술이 그들만의 리그로 남아있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제와 제작 방식을 변경을 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인상파 화가들이 찰나를 순식간에 그려내는 제작 방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림의 완성도는 완전하고 무결한 섬세함과 선명함에 있지 않고 '찰나의 인상'을 얼마나 잘 전달하는 데 있다고 믿었던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시도는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지금의 미술은 과거 미술의 필연적 발전의 역사적 결과물이 아니다. 한 개인의 문제의식과 의지가 우연적으로 겹쳐지고 반복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전시를 통해 수많은 우연적 사건들과 개개인의 의지가 반영된 서양 미술의 역사를 훑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