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y Shin Jun 24. 2022

이름과 정의

나는 누구인가

 초등학교 때 학교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먼 옛날, 어린 나이였지만 논설문 형태로 글을 쓰면 자주 칭찬을 받거나 높은 점수, 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학교장 추천으로 학교 대표로 나갔던 글짓기 대회 역시 특별히 글짓기 교육을 따로 받거나 누군가의 지도를 받지는 못한 채로 그냥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대회 일주일 전이었을까. 갑자기 글짓기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나름 똑똑하고 조숙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시험을 봐도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서 문제를 풀고는 했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그토록 큰 대회에서 원하는 글짓기란 무엇일까? 내가 늘 하던 방식이 맞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해 버린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난 도서관마저 친하지 않았기에 도움을 청할 곳도 마련하지 못하고 혼자 골머리를 앓다가 문득 집 책장에 꽂힌 어느 동화책을 보게 된다.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그 책에 영향을 받아버린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내가 나간 대회는 남북통일 혹은 평화에 대한 주제 행사였는데 그곳에서 여러 동물이 나오는 어린이 동화를 쓰고 나왔기 때문이다. '동물들이 합창했다'라는 문장도 갑자기 헷갈려서 '합장했다'라고 적고 나오는 기이함도 보였다. 수도원도 아닌데 왜 동물들이 합장했을까? 심사위원들이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것도 학교 대표로 가서 그런 기행을 벌였으니 학교 이름에 먹칠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지, 그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 했는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사실 난 지금도 미련하게도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와는 달리 책과 인터넷의 도움을 받고 있을 뿐 누군가를 크게 의지하지 않는다. 아마 타고난 기질인 듯하다. 아니라면 그때 당시 이른 사춘기로 머리가 혼란스러웠거나 갑자기 큰 숙제를 맡은 나머지 의미 포화, 미시감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의심도 들지만, 심리학자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한다. 무엇보다 글짓기 대회를 통해 내가 중요하게 알게 된 것은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면 단어든 사물이든 그 본질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관련된 일화를 몸소 겪으니 느껴지는 바는 사뭇 달랐다. 그 후로도 몇 번은 더 익숙한 단어가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작가의 의도는 아닐지 모르나 이 시를 떠올리면 이름, 단어와 그 정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현대적으로 지어진 친구들 이름과는 달리 옛날 사람들에게 많이 붙여진 이름이기에. 사랑하는 엄마, 아빠께서 머리를 맞대고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이지만 발음도 어렵고 뜻도 그렇고 영 맘에 안 들었다.

그래도 누가 이름을 물으면 '000입니다'라고 대답을   있지만, 이름  자가 아닌 '당신은 누구이며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직도 정의를 내리지 못했기에 우물쭈물할 것이다. 몇십 년을 고민하고 있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어쩌면 삶의 태도와 상관이 있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기회비용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쉽게 포기했고 원하는 것을 입에 담지도 않았으며 그냥 큰 탈 없이 사는 게 순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기준이 상대적이기에 꼭 그렇다 확언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나 보다.


학교 공부는 국어와 과학이 재미있었지만 제대로 된 진로 지도 없이 고등학교 이과에 진학했고 취직이 잘 된다는 공대에 합격하게 된다. 그래도 꿈 많은 어린 시절엔 되고 싶은 것이 많았더랬다. 모델, 작가, 과학자, 라디오 디제이, 뮤지컬 배우, 가수, 싱어송라이터 등등...

음악 관련 직업이 많았던 이유는... 학창 시절 받아본 유일한 사교육이 피아노 학원이기도 하고, 늘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음악프로, 광고음악을 보고 들으며 나름의 음악 공부를 했기 때문인 듯하다. 마치 할렘가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줄넘기를 하고 춤을 추었듯이 말이다.


그렇게 기회비용이 없고 낭비할 시간이 없던 나는 공학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외우고 시험 봐서 대학에 입학했고 같은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같은 계통의 회사에 취직했다.

 통계적인 근속기간보다 약간 긴 시간 동안 회사 밥을 먹었고 회사의 경영과 구조적인 문제 덕분에 가까스로 회사를 탈출하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더 많은 연봉을 주었던 회사였기에 비록 등 떠밀려 나오는 모양새였지만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긴 과거의 일을 굳이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열하는 이유는.

이제야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할 일을 찾고 경험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나를 정의하는 이 긴 여정이 성공적으로 마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자신을 찾는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다음 글엔 나에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사건에 관해 쓰려고 한다.

일명 늦은 덕질(팬 활동).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즉흥적으로 브런치에 글을 남겼었다.

갑자기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처럼.

한숨에 적고 작가 신청을 누른 후 그다음 주를 맞이했는데

월요일 오후, 작가님 축하드린다는 알람을 받았다.

덕분에 차근차근 내 삶도 정리하고 나도 정의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브런치에 고마움을 전한다.

밝은 날 다시 본 내 글은 엉망이었지만

수정하다가 죽을 때까지 발행을 못 할 것만 같아

이만 버튼을 누를까 한다.

나 자신을 너무 노출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그 흔한 SNS도 하지 않던 내가

작가님이라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공중으로 날 던지는 것을 보면.

역시 단어와 정의의 관계는 중요한가 보다.

나에게 있어 작가라는 단어는 꽤 소중한 정의가 아니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