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길이 425KM, 26 ROUTES
22년 12월 8일, '10-1 ROUTE'인 가파도 올레를 마지막으로 425KM, 26 ROUTES의 올레길을 3년여 만에 완주했다. 올레길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건 3년 전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건 작년 10월쯤이었으니까 만 1년여 만에 완주한 셈이 된다.
올레길의 완주에 대한 절대적인 목표가 있다면 다른 일들은 모두 접어두고 1달 만에도 끝낼 수야 있었겠지만 여러 사정상 한 달간 집을 비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라, 짧게는 닷새에서 길게는 열흘여씩 제주를 다니며 올레길을 완주할 수 있었다
제주올레협회에서는 해마다 10월 말~11월 초 사이에 3일에 걸쳐 3개의 ROUTES를 걷는 올레 축제를 한다.
나 역시 3년여 전인 19년 가을, 캐나다 로키 트레킹을 함께 했던 선행 올레꾼들의 초대로 그해 가을 올레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처음 올레길을 접하였다. 그때는 그저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호기심 등의 가벼운 마음으로 완주라는 목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채 축제를 즐겨보자는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올레길을 걸어야겠다는 어떠한 계기나 구체적인 목표가 없이 가볍게 생각하고 쫓아나선 길이어서인지 그 뒤로 올레길은 자연스레 마음에서 멀어져 갔고 거기에 '코로나'라는 몹쓸 역병까지 겹쳐 축제에서 장만했던 '올레 수첩' 은 서랍 속 깊이 처박혀 버렸다.
악재는 겹쳐 온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 남편의 퇴직에 대해 나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았지만 그래도 어느 날 갑작스러운 퇴직 통보는 당황스러웠고 거기 더해 내가 도모하던 일들 또한 모두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면서 더해지는 자괴감에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자존감은 삶에 대한 의욕마저 떨어뜨렸고, 정말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 작년 10월쯤 문득 올레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하루하루 걸을수록 마치 엉클어진 실타래가 풀리 듯이 복잡했던 마음들이 서서히 정리가 되어갔고 마음의 우울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집에 있으면 이것저것 부정적으로만 들던 생각들이 올레길을 걸으면서는 그저 걷는 데만 집중해서인지 단순해지면서 잃었던 웃음도 다시 되찾게 되었고, 그게 뭐라고 올레 수첩에 도장 하나 찍을 때마다 어떤 성취감 같은 것도 느껴지며 저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감도 조금씩 회복되어갔다.
걸으면서 위로가 됐을 수도 있었을 테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현 상황에 대한 적응이나 타협일 수도 있었을 테고 어쩌면 정말 해결된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큰 기대를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서서히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되자 올레길을 걷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고 올레 수첩 각 ROUTE마다의 완주 도장도 빼곡해져 갔다. 마음의 상처도 몸의 상처도 적당한 시간이 지나야 치유가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지난 일 년이다.
올레길을 처음 시작할 때는 완주하겠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절반 이상의 ROUTES를 걷고 나니 '이왕 시작한 거 완주해보자'라는 마음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엊그제 무사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걷는 것을 즐길 때는 여유로울 수 있었으나, 어느 순간 완주를 해 보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부터는 점점 마음이 급해졌고 마지막 몇 개의 ROUTES를 남겨놓고는 여유로움은커녕 마치 숙제하는 마음으로 쫓기 듯 마무리를 짓게 된 점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올레길의 전 ROUTES를 완주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자랑스럽기만 할 줄 알았는데 무언지 모를 공허함이랄까...? 한편으로는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의 허탈감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올레 '완주자 배지'는 제주의 바다색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귤을 상징하는 오렌지색의 두 가지가 있다. 한 번 완주에 두 가지 색 중 한 가지 만을 받을 수가 있는데 나는 이번에 계절이 계절인지라 따뜻한 느낌의 오렌지색을 선택했고 파란색 배지를 하나 더 받기 위한 미련 혹은 욕심이라고 해 둬야겠다.
작년 가을, 처음 올레길을 나설 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너무나도 막막했고 코로나로 제주의 일반 시민들은 외지인들의 방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조심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마주치는 마을 주민들께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드리면 웃음으로 대해 주셨고, 어느 귤밭에서는 '무료입니다. 귤 드시면서 걸으세요'라는 문구까지 써 놓은 채 귤 한 박스를 통 크게 내놓으신 주민 분도 계셨다. 또 다른 귤밭 주인 분은 직접 귤을 따 주기까지 하면서 "많이 가져가셔도 돼요" 하시는데 짊어지고 갈 배낭이 걱정되어 "그만 주세요"라는 말씀을 드렸을 정도로 푸짐하게 챙겨 주시는 분도 계셔서 제주의 정을 듬뿍 받아보기도 하였다.
마지막 일정이었던 이번 서쪽 올레에서는 날씨가 새초롬하게 춥기도 하고 다리가 아프기도 하여 양지바른 담장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처량해 보였는지 집주인 내외분이 "모양이 이래도 이게 유기농 귤이에요. 드셔 보세요" 라며 챙겨주시는 따뜻한 마음에 나의 피로까지 모두 날아가는 듯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막막했던 제주 올레길의 교통편과 숙소는 이제 여유롭게 고를 줄 알게 되었고, 경치 좋은 바닷가에서는 맥주 한 캔 마실 수 있는 한가로움도 느껴 보았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올레길 한 곳을 고르라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겠다.
26개의 각각의 ROUTES가 (2023년부터는 27 ROUTES) 다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아름다움이 모두 다르기에 마치 어린아이한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 어리석은 질문 같다고나 할까..?
단지, 제주에서 처음 바다를 보면 "야~ 바다다"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바다보다는 내륙의 마을 구경이나 곶자왈, 오름 등을 보는 재미가 더 쏠쏠해지긴 했다. 물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주 동쪽의 서우봉과 함께하는 함덕 바다나 제주의 울돌목이라 불리는 관곶 바다의 파도는 제외해야겠지만 말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이번 올레길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지나간 저지 곶자왈이나 저지오름, 장한철 생가 주변의 해변 길은 다음에 여유를 갖고 다시 찾고 싶은 구간이긴 하다.
10-1 ROUTE인 가파도 또한 봄의 청보리 밭으로 유명하다는데 올해 안에 올레를 완주하겠다는 마음이 앞서 내년 봄의 청보리밭을 기다리지 못하고 12월의 쓸쓸한 가파도를 보고 왔으니 푸릇푸릇한 청보리밭을 보러 한번 더 방문해야 될 것 같다.
내가 반한, 섬 속의 섬 추자도 돈대산의 일몰도 다시 보고 싶고.. 새로 생긴 ROUTE인 18-2의 대왕산 길도 궁금하고.. 아무래도 내년 봄에 제주 올레길을 다시 걸을 것만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