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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아 Jun 09. 2023

끈적한 살결로 아직 봄날에 머물러있는 나

여름이 검지손가락으로 초인종을 누른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어릴 적 누군가 우리 집에 찾아오면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렸던 것처럼 두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몇 분이 지났을 까. 그럼에도 잦아들지 않는 초인종 소리에 하는 수 없이 대문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 조그마한 구멍사이로 그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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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싫은 이유를 나열하라면 100가지도 넘게 얘기할 수 있다.

강렬한 태양에 자동으로 찌푸려지는 내 미간.

나온 지 1분도 채 안 돼서 정수리부터 흘러내리는 땀방울.

흥건해지는 겨드랑이와 축축해지는 엉덩이 밑.

아스팔트인지 철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뜨거운 열기의 잔상.

길에서 전남자친구를 마주친 것 마냥 당혹스러운 소나기.

방금 샤워하고 나왔지만 어느새 끈적해져 있는 살결.

수많은 끔찍함들 속에서도, 단연코 최악인 건 올해도 벌써 절반이 지났다는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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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출발의 신호탄 같은 봄은 무수한 욕망과 게으름에 사로잡혀있는 나에게 괜한 명분거리를 준다.

이제부터 하면 되지 않겠냐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그렇게 3월, 4월 5월을 흘러 보냈다. 주어진 명분 속에서 대충이지만 열심히, 기쁘지만 우울하게, 성실하지만 나태하게 살았다. 모순 덩어리를 들켜서일까. 달력을 넘겨 확인한 6월이 달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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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12달.

절반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숫자 "6"은 양쪽 어깨를 짓누르기 충분했다. "한 것도 없는데 1년의 반이 가버렸다. " "뭐 했다고 벌써 여름이냐"라는 둥 신세한탄의 달로 불리는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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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내 생일도 6월이다. 6월 끝물에 태어난 나는 초여름이 한여름 즉 "대서(大暑)"로 나아가는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는 시기다. 더위에 취약한 내가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여름. 고등학생땐 무리 지어 다녔던 애들과 생일선물을 빙자한 의무감 생일파티와 별 볼 일 없는 머리통에 온갖 것들을 주입시켜야 했던 기말고사까지. 여름이란 계절은 어쩐지 불쾌지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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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그를 알기에.

이제는 그와 함께해야 하는 시간이 더욱더 길어질 거라는 걸 알기에.

어서 함께 공생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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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하게 내리 째던 햇빛 덕분에 찡그림 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3월의 내 모습은 어쩐지 행복해 보인다. 그날의 향기를 잃어버릴까. 이전에 작성한 글도 다시 한번 눈에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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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봄날에 머물러 있는데, 팔꿈치에는 금세 땀이 차서 끈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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