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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마님 Dec 29. 2023

귀촌일기/ 4주차

남극의 셰프

12월 18일 월요일

눈이 와서 숲을 정리하는 일도, 밭을 정리하는 일도 잠시 쉬고 있다. 몸이 찌뿌둥하다. 오전에 면사무소에 가서 몇 가지 업무를 처리하기로 한다.

명우는 풍수해보험에 가입했다. 염화칼슘은 15kg짜리를 인당 5포대까지 무료로 준다고 한다. 창고로 가니 우리가 거의 막차 같았다. 마을 이장님들이 트럭으로 마을사람들 몫까지 실어서 가져가니 쭉쭉 닳는 모양이다. 

그 사이 나는 정부보급종이라는 옥수수와 감자 종자를 한 포대 씩 신청했다. 농업인은 반값에 살 수 있다는데, 나는 농업경영체가 아직 아니라서 일반가격에 사게 된다. 이게 싼 건지 아닌지, 좋은 건지 아닌지 사실 잘 모른다. 어쨌든 옥수수와 감자는 필요하니까. 좋아하는 찰옥수수와 수미감자로 골라 신청서를 넣었다. 신청은 선착순으로 지금 하지만, 종자는 나중에 농협에 가서 비용을 내고 가져가면 된다고 한다. 


면사무소 일을 마치고 인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CGV에 갔다. 체육센터와 문화센터가 같이 있는 새 건물이어서 시설이 아주 좋다. 1층 헬스장과 수영장은 입장료가 3천원이다. CGV도 아마 전국에서 가장 저렴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 3월에 개관했을 때 6천원이었는데 지금 천원 올라 7천원이라고. 좌석 사이로 팔걸이도 넓고 사운드도 아주 좋다. 천만관객 돌파를 앞둔 <서울의 봄>이 오후 1시 상영. 손님이 우리까지 7명이었다. 영화를 보고 수영하고, 영화 대기하는 곳은 카페처럼 넓고 따뜻해서 여기에서 공부하면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겠다. 명우가 여기 일자리를 잡게 되면 따라다녀야지!


12월 21일 목요일

급히 달려가는 키 큰 사슴과 동물의 뒷모습을 봤다! 뿅~ 하고 엉덩이만 위로 쏙 나온 다음 내리막으로 사라져버렸다. 엉덩이에 커다랗고 북실한 흰 털을 확실히 보여주고 떠났다. 거꾸로 그린 하얀 하트모양 궁뎅이를 외워 두었다가 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 친구는 노루였다. 앞 산에서 야~ 어으~ 허엉~ 하고 울어대는 녀석이 있어 고라니라고 생각했는데, 노루도 있었네? 눈 쌓인 잣나무 숲에서는 사슴과 동물의 똥이 보인다. 

눈이 오니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는 재미가 있다. 그들은 정말 매일 와서 새로운 자국을 남겨 둔다.


12월 26일 화요일

최근에 본 영화들이 자극적이고 잔인하기도 해서, 스트레스 없는 영화를 골랐다. 넷플릭스  <남극의 셰프>. 일본식 개그에 묘하게 빠져드는 잔잔한 일본영화다. 남극에 발령 나간 일본기지의 8명이 주인공이다. 그들 중 일부는 서서히, 심심함에 미쳐간다. “내가 여길 왜 온다고 해서.” 부분에서 뜨끔했다. 겨울이 되면 해도 짧고 추워서 정말 할 일이 없다. 재료 다듬고, 요리하고, 책을 읽고, 외부 통신을 기다리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다음 간식과 특식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거기서 내 모습이 보였다. 

강원도 인제는 일년 중 절반이 겨울이다. 게다가 나는 해가 잘 들지 않는 산중턱의 북향집에 산다. 요즘 나의 취미는 요리 유투브 보고 따라 하기인데, 추워서 소화가 잘 안되는지 두 끼를 소화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처음엔 책만 내리 읽었는데, 이번주부터는 내려 놨던 그림도 그려 보려고 도구도 펼쳐 놓고, 구멍 난 옷에 천을 덧대어 바느질도 해본다. 그래도 시간이 진짜 안 간다. 일본영화를 보고 나니 일본식 닭튀김에 맥주가 먹고 싶다. 180도에 두 번 튀겨야 바삭하다고, 남극의 셰프가 그랬다. 


12월 27~28일

아침 열 시쯤, 거실 창 앞에 서면 작은 새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창문을 살짝 열어 소리도 함께 듣는다. 아침에만 잠깐 왔다가 어디론가 가버린다. 평소엔 박새나 참새떼가 와서 여뀌 씨앗을 먹는 걸 고양이와 함께 지켜본다. 

오늘은 독특한 새를 발견해서 얼른 사진을 찍어 두었다. 노랑턱멧새 수컷이다. 얼굴 아랫쪽 노란털과, 기름칠해 올린 듯한 검정털이 마치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축구감독 같다. 

노랑턱멧새가 지나간 자리에는 형광 분홍빛의 배털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작은 새가 왔다. 찾아보니 이 친구 이름은 ‘멋쟁이새’라고 한다. 다른 새들도 다 멋진데 유독 이 친구만 이름이 주황뭐시기, 분홍뭐시기도 아닌 멋쟁이새라는 게 재미있다. 엄청 귀한 새들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보고 이름도 알고 나니 산책할 때 종종 보인다. 다음 날엔 멋쟁이새 여러 마리가 떼지어 노는 것도 보고, 분홍수컷이 아닌 수수한 암컷과 함께 있는 모습도 보았다.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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