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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든 적든, 언제든 새로운 걸 시작할 수 있다고

인터뷰어 정연 / 포토그래퍼 림

by 휴스꾸


* 선우 과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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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연구에 대한 판타지가 깨지기도 했어요.

연구라고 하면 좀 더 똑똑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써서 논문을 쭉쭉 써 내려갈 거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수작업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단순히 내가 속한 집단이 바뀐다고 해서 연구 환경이나 과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건 아니구나, 그런 환상이 한순간에 실현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결국, 부족한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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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하다 보면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가 많아요.

처음에는 ‘A와 B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라고 가설을 세웠는데, 막상 분석해 보면 상관이 없을 때가 있죠.

그럴 때 허탈하고 화가 나기도 해요. 저는 ‘뭔가 연관성이 있긴 할 거야’ 하면서 계속 찾아보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사실 연구에서는 포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거든요. 데이터상으로 관계가 없는 거라면, 내가 조사한 방법이 잘못됐거나, 혹은 정말 상관이 없는 거니까요. 교수님도 ‘이제 그만하고 보내주자’라고 조언해 주셔서, 저도 점점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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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님에게 학회는 어떤 경험이었나요?

그때 하나의 생각을 원의 형태로 만드는 게 아니라, 다각형처럼 다양한 시각을 결합해 나갔던 것 같아요. 누군가의 의견을 배제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시각을 반영할 방법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조각들을 이어 붙여서 하나의 논문을 완성하는 느낌이랄까요.


신경범죄학연합학회에서 공동으로 페이퍼를 작성했는데,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 기술이 법적으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를 다룬 논문이었어요. 학부생 때처럼 단순히 역할을 나눠서 맡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 같이 모여서 브레인스토밍했어요. 그때 공동체로서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연구를 통해 그 과정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법을 많이 배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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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어요.

지금도 친구들이 놀리는 이야기 중 하나인데, 한번은 집에 돌아와서 불 꺼진 방을 보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그냥 현관에 주저앉아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엉엉 울었어요.

교환학생의 한 학기 동안 수업을 거의 안 듣고, 친구도 사귀고, 파티도 가고, 여행도 다니면서 지냈어요. 학교에서 진행하는 동아리 활동이나 콘퍼런스에도 참여했죠. 그 시간이 저에게는, ‘조금 풀어져서 살아도 인생은 괜찮구나’라고 깨닫는 계기가 됐어요. 너무 강박적으로 살지 않아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구나, 그냥 즐기면서 사는 것도 삶을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이 될 수 있구나, 그런 걸 배웠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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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살아있는 한 기회는 계속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나이가 많든 적든, 언제든 새로운 걸 시작할 수 있다고요.

‘영재발굴단’ 같은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봤던 한 장면이 기억나요. 거기서 조그만 남자아이가 "평가는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우리는 살면서 계속 "그때 그 행동은 틀렸어." "이 선택은 맞았어." 이렇게 평가하잖아요.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결국 우리가 내린 선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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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배우는 이유가 있나요?

굳이 쓰지 않을 언어를 배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결국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사고를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언어만큼 하나의 문화와 세계관을 온전히 담고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맵다’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면, 영어로는 ‘spicy’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되지만, 한국어에는 ‘맵다’, ‘매콤하다’, ‘칼칼하다’, ‘얼큰하다’, ‘알싸하다’처럼 미묘한 차이를 가진 다양한 표현이 있어요. 우리는 이 단어들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죠. 꼭 모든 단어를 다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면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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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든다면요?

음식점 리뷰에 대해 나라별 언어 분석을 한 적이 있어요. 영어 리뷰에서는 식감에 대한 표현이 특히 많았는데, 한국어 리뷰에서는 ‘맵다, 매콤하다, 얼큰하다’ 같은 미묘한 맛의 차이를 설명하는 표현이 많더라고요. 또 영어 리뷰는 맛을 표현할 때 주로 ‘재료명’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예를 들어 초콜릿 쿠키를 먹고 "초콜릿 맛이 강해요”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반면, 한국어 리뷰에서는 특정 재료보다는 음식의 전반적인 맛의 특징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순댓국을 먹으면서 "순대 맛이 진해요"라고 하기보다는, "잡내가 없고, 짜지 않고 슴슴해요" 같은 표현을 사용하죠.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를 고민하다가, 저는 한국어와 영어가 맛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문화적인 차이가 반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차이를 보면, 한국인들은 리뷰를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단순히 ‘이 음식이 맛있다’ 또는 ‘맛없다’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세세하게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먹었을 때 이런 맛이 났고, 이래서 좋았고, 이래서 아쉬웠다’ 같은 식이죠.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가설이라서 논문에는 포함하지 못했지만, 후속 연구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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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고 싶지 않은 '초심'이 있다면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요.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해요. 성별, 인종,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배울 점이 있다고 믿어요. 그런데 사람은 노력한 만큼 자부심이 생기잖아요. ‘내가 이만큼 열심히 했으니까, 이건 확실히 알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오거든요. 자신감을 갖는 건 좋지만, "나는 다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성장이 멈추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계속 배우고 싶어요. 세상의 모든 걸 다 알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계속 배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어 정연 / 포토그래퍼 림

2024.01.13 선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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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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