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아.
지난 5월 초, 갑작스레 프로그램 하차 통보를 받았다. 금요일 퇴근 1시간을 앞두고 이뤄진 부장과의 면담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퇴근길에 친한 회사 동기에게 연락해 술을 조금 마셨다. '단순히 회사에 사람이 부족해서..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이 모든 걸 받아들이기에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동기에게 내가 겪은 상황과 감정 상태를 토로하면서 눈물도 꽤 났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나는 회사를 가야만 했다. 토요일이었지만 프로그램이 안정화되기 전이었고, 도와주는 스태프조차 방송 일에 익숙지 않았다. 다음 주에 있을 원활한 녹화를 위해서는 내가 더 많이 움직이고, 꼼꼼히 챙겨야만 했다.
출근하자마자 당기는 건 '아이스 바닐라라테'. 내가 피곤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꼭 필요한 처방약이다. 커피를 사러 가기 위해 회사 로비를 지나는데 갑자기 관리소장님께서 나를 불렀다.
"박 PD 님, 휴일인데 어쩐 일이세요?"
(소장님은 내가 야근을 하거나 주말에 보일 때면 늘 하이톤으로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신다)
"아, 일이 좀 있어서요. 얼른 끝내고 집에 가아죠".
"지금은 어디 가시는데?"
"커피 하나 사 오려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장님은 안내데스크를 나와 나를 따라오셨다.
"박 PD 님 내가 커피 하나 사드릴게."
"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이미 나를 앞질러 정문을 통과하고 계셨다. 당황한 나는 카페에 도착해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을 거절했지만 끝내 소장님이 결제를 하셨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대뜸 물었다.
"소장님은 뭐 안 드세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이스커피 드실래요?" 하고 지갑을 꺼내는데
소장님 왈, "나는 원래 커피 안 마셔요. 박 PD 님이 맛있게 마셔주면 그걸로 됐어요. 언젠가는 꼭 커피 한 잔 사주고 싶었거든요. 밥이면 더 좋고. 허허."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 진짜 안 사주셔도 되는데.."
"내가 매일 안내 데스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 보잖아요. 이 건물에서 박PD님이 항상 밝게 웃고 다녀요. 긍정적인 에너지라고 해야 하나. 그런 모습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아져요. 그래서 내가 더 고마워요."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소장님, 제가 사실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 아닌데....'
아 물론 회사 로비를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 제일 목소리가 크고 시끄러운 사람은 나다. 나는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 쉽게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서 작가들과 점심 먹으러 갈 때도 별 거 아닌 것에 많이 웃고 떠든다. 그런 순간마저 없으면 회사는 그야말로 '회색도시' 아니 '회색지옥'일 것만 같으니.
사실 나는 가끔 혹은 자주, 생각과 고민이 지나치게 많은 걱정덩어리로 변하기도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혼자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불안감에 머릿속은 늘 복잡하다. (전쟁, 지구 멸망 이런 게 아닌 내게 꼭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자책하고는 한다. 고치려고 노력도 해 봤지만, 기질인지 성격인지 쉽게 고쳐지질 않는다. 한 번 감정이 밑바닥을 치면 북한까지 땅굴을 파고 돌아오니 말이다. 아마 불안장애의 증상을 겪게 된 것도 이런 성향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얼떨결에 관리소장님이 사주신 커피를 받아 들고 편집실에 올라왔다.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바라보는데 괜히 코끝이 찡했다. 3800원짜리 커피 한잔이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는 순간이었다. 내게 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남들은 몰라도 나는 너의 진심을 안다고. 곧 모두가 그걸 알게 될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잠깐 회사를 쉬게 됐다. 마지막 출근 하던 날 소장님을 뵙기 위해 안내데스크로 갔지만 근무날이 아니었고 끝내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까.
운동을 다녀와 집 정리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또 스팸전화인가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별 거부감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박** PD님 핸드폰인가요?"
"네,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누구실까요?"
"아 접니다. 관리소장. 허허."
그랬다. 내게 커피를 사주셨던 관리소장님이었다. 대체 언제 회사에 돌아오냐는 질문. 금방 올 줄 알았는데 계속 안 보여서 자기가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처를 물어서 전화했다고. 맛있는 밥 한 끼 사주고 싶으니 꼭 연락 달라고. 그렇게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전화가 반갑기도 했다. 웬만해선 회사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번만큼은 예의를 지켜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3주 후 나는 점심 약속을 잡았다.
밥을 먹으며 소장님께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제게 밥을 사고 싶다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커피도 너무 감사했는데 제가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죄송해서요.?
답변은 정말 간단했다.
"정이 가서요."
"네? 제가요? 아.. 그런가요?"
"아마 직장 상사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건데? 그냥 그런 사람 있잖아요. 아무 이유 없이 정이 가고, 그래서 챙겨주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 사람. PD님은 그런 사람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단어 말고는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부끄러워진 나는 얼른 장어를 입안 가득 넣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저 나를 좋게 바라봐주고, 챙겨주고, 생각해 줄 수 있는 거구나.
나는 이렇게 사랑받는 사람이구나. 벅찬 감정이었다고 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누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때린 것처럼 순간 '띵'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장어구이를 정말 맛있게, 후식으로 시킨 누룽지까지 최선을 다해 먹었다.
집에 돌아와 소장님이 주신 종이가방을 열어보니 시골에서 직접 짠 참기름과 롤케이크 두상자가 들어있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내가 뭐라고...
고소한 내가 진동을 하는 참기름을 냉장고에 넣으며 생각했다.
불쑥 용기가 생겼다. 아니 이상한 확신이 생겼달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기하게도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늘 내게 도움을 줬다. 그 상대가 정말 친한 사이기도 했고, 때론 연결고리가 없는 지인이기도 했다. 시절인연처럼 지금은 인연이 끊겼거나 안부 인사조차 소홀해진 사이도 있지만 분명 그때 그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내게 위로와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를, 나의 미약한 관심과 작은 행동이 도움과 위안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에게 크게 와닿기를, 그래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두 달 후 회사 동기를 만났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소장님과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동기는 대뜸 외쳤다. "언니! 이건 엄청난 일이야. 아무나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거고. 언니만이 가진 재능이야. 충분히 자랑스러워하고, 특별하다고 여겨도 돼. 진심이야."
그랬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소장님과 밥을 먹었던 날, 나는 집에 돌아와 감사의 문자를 보냈었다.
그리고 이어진 소장님의 답장.
"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행복하셔요. "
소장님이 내게 밥을 사줬던 건, 어쩌면 잠시 행복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을 내가 걱정돼서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서 행복할 권리가 있다. 다들 행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