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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 Nov 24. 2023

컨닝은 했지만, 들켜서 잘 됐다

K장녀의 반항

"얼른 한숨 자고 일어나서 내일 시험 볼 거 공부해!"


시험 기간이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한테 듣던 말이다. 겉으로는 말 잘 듣는 착한 큰 딸이었던 나는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낮잠을 2시간 정도 자고 그때부터 다음 날 시험 보러 가기 전까지 계속 공부를 해야 했다. 뭐... 시험범위를 다 공부하지 못했기에 밤샘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잠이 들면 기껏 외운 걸 다 까먹을 거 같은 두려움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하게 만들었다.


난 머리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IQ도 무난 무난, 공부머리도 무난 무난이었다. 어머니의 학구열 덕분에 온갖 학원과 과외를 섭렵했기에 그나마 상위권 성적을 사수했지, 안 그랬음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리를 내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시험기간이 되기 바로 전에 문방구에 들려 손바닥만 한 아주 큰 지우개를 샀다. 그리고 그 지우개를 평편하게 반으로 가른 후, 한 쪽 면만 테이프로 붙여 지우개를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다음에 내가 한 행동이 무엇일까? 썼다. 교과서에서 도저히 안 외워지는 부분을 지우개에 조그맣게 써 내려갔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머릿속 한 쪽에서는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시험을 망치면 어머니한테 들을 꾸중이 너무도 무서웠다. 나한테 실망했다는 듯한 그 목소리와 얼굴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밤새 작은 글씨로 그 지우개 안쪽을 빽빽하게 채웠다. 막상 쓰고 보니 손이 덜덜 떨렸다. 시험시간에 이걸 과연 볼 수 있을까? 들키진 않을까? 들키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이 지우개를 보지 않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험을 망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이겠지.


시험시간이 다가온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손바닥만 한 지우개와 샤프, 검은 사인펜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시험지가 다가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지우개를 만지작 만지작 하게 된다. 그때 생각했다.


'아..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그럼에도 그 지우개를 서랍 안으로 넣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서 지우개를 열고 닫으며 나는 컨닝을 했다. 처음에는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이때 그만뒀어야 되는 것을. 아는 문제도 맞는지 확인하고 파서 지우개를 계속 열고 닫고 했다. 그러던 한순간, 뒤에서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걸.렸.구.나


선생님은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적당한 상위권에 선생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이 지우개에 컨닝페이퍼를 만들어 시험을 보고 있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셨겠지.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도 나도 서로 말없이 잠시 서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 시험은 실기 점수만 반영이 되고, 필기 점수는 0점 처리되었다. 어머니의 선물로 해당 과목 선생님도 나에 대한 화를 푸셨다. 지금이야 김영란법에 의해 선생님들께 선물 등이 안 되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기에 우리 어머니는 선물 공세를 퍼붓다시피 하셨었다. 그 덕에 나는 컨닝을 하고도 0점 처리만 되었을 뿐 학교생활기록부에 그 어떤 벌점이나 기록이 남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씁쓸하다.


"내일 거 공부해!"


왜 그랬냐고, 뭐 때문에 그랬냐고 한 번 만 물어봐 주셨다면 어땠을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로 내일 거 공부하라고 하시는 어머니가 참 야속했다. "난 공부 하기 싫어요. 엄마" 이 말이 왜 그리도 하기 힘들었을까. 컨닝은 했지만 바로 들켜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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