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운 삶이란
유대인들은 공부할 때 항상 다음의 격언을 마음에 상기한다.
“만일 책과 옷을 더럽혔을 때에는 먼저 책부터 닦아라. 복습은 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복습하는 동안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번 복습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좋은 학생이 될 수 없다. 사람은 탐욕스럽게 배워야 한다. 만일 눈앞에 천사가 나타나 토라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가르쳐준다고 해도 나는 거절하겠다. 사람에게는 배우는 과정이야 말로 결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교육에 있어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유대인 교육법은 1%의 승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인간 모두를 100% 인재로 만드는 교육을 지향한다. 유대인의 저력은 모두를 성공자로 만드는 교육법에 기인한다. 유대인은 모든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기분 소양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또 그 모든 과정을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같이 신성하고 종교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 구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호세아 4:6
유대인은 하나님과 지혜에 대해 배우는 일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만큼 신성하다고 여겼다. 속세에서 출세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닌, 신앙만큼이나 공부는 그들의 삶의 목적 그 자체였던 것이다. 유대인은 출세를 위해 교육시키지 않는다. 유대인의 교육은 자녀를 타인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쌓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타인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탈무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공부를 거듭할수록 유대인에게 타인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고, 돕기 위한 존재로 인식된다.
이처럼 교육의 동기자체가 선하다 보니 유대인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닌 선함, 지혜로움을 좇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또 유대인들은 공부를 아무리 해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면 할수록 소명의식이 깊어지고,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유대인들은 자녀의 장래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갖지 않는다. 물론 공부를 장려하지만, 목적 자체가 출세가 아닌 배움 자체가 목적일 뿐 절대 배움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유대인에게 배움의 목적은 하나님과 그의 지혜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또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것이다.
탈무드는 배움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배우면 신중해지고, 신중하면 열정이 생기고, 열정이 생기면 정결해지고, 정결해지면 자제할 수 있고, 자제할 수 있으면 순결해지고, 순결하면 신성해지고, 신성하면 겸손해지고, 겸손하면 죄가 두렵고, 죄가 두려우면 고결해지고, 고결하면 영혼이 성스러워지고, 영혼이 성스러워지면 영생한다.”
반면 한국의 교육은 무엇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한국의 교육은 입시라는 하나의 목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학생과 부모들은 높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전부를 건다시피 한다. 그래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당장이라도 사회의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자식의 성적이 나오지 않을 경우 속이 타들어만 간다. 필자는 학창 시절을 낙오자가 된 기분으로 대부분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필자의 부모님은 입시에 강권적이시지도 않았고, 입시가 전부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명문대를 가는 것이 인생을 편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내심의 기대를 내비치시곤 했다. 부모님께서 입시 위주 교육의 문제점을 몰랐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두 분 모두 마음고생을 하셨지만, 별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필자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즐겨했고, 언어 교육도 조기에 받았다. 이 모든 교육은 특목고를 가기 위함이었다. 특목고를 가려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명문대 진학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냈을 때 몰려오는 자괴감과 우울함은 필자를 학창 시절 동안 웃음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학교를 자퇴하고 떠난 유학길에서 난 깨달았다. 고작 입시 하나가 인생을 좌지우지하기엔 세상은 넓다는 것을. 또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만족할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실패는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다. 낙오자란 실패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에 잠식당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고서 유대인에 대해 공부할 땐 ‘만약 과거에 내가 유대인의 교육법으로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좋은 대학에 진학했을 거라는 장담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족함을 자책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고 우울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으리라.
우리나라 부모들이 유대인 자녀교육에 관심을 많이 가지기는 하지만, 그 이유가 유대인의 교육성과에 관심이 국한되어 있다. 유대 교육하면 대개 노벨상과 세계적인 부를 거머쥔 인재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들의 업적과 부를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입장이다. 사실 필자가 처음 유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그러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노벨상을 우리가 우러러보는 것만큼 대단히 생각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자녀의 장래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갖지 않는다. 공부는 장려하지만, 그 목적자체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당대의 존경받는 랍비야말로 최고의 지성으로 인정한다.
유대인은 자신의 존속만을 위해 공부하지 않는다. 유대인에게 우리가 부러워하는 노벨상, 부와 명성은 열심히 공부했을 때 따라온 부가적인 성과일 뿐, 목표가 아니었다. 타인을 위해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유대인의 최종 목표다. 이와 같은 교육법은 늘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사고를 형성한다. 또 근시안적인 성과보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유대인이 학문과 배움을 바탕으로 하는 서비스 산업에 유독 특출 난 성과를 보이는 이유다. 이타적 사고가 발달한 유대인은 공부의 목적이 ‘나’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의 행복에 있다.
유대인은 학교 교육이 교육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인은 밥상머리에서 코셔를 행함으로써 유대 율법과 인성 교육을 배움 받는다. 코셔란 유대 율법에 의거하여 음식의 재료를 선택하고 조리하는 것을 말한다. 코셔는 매일의 식습관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또 코셔는 정결한 식습관을 통해 영혼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다. 식습관을 통해서도 공부와 삶을 하나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한국인은 대체적으로 공부와 삶을 따로 보곤 한다. 결과만 만족스럽다면야 과정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 몸과 마음이 병이 드는 일이 잦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건강히 지내는 것도 공부의 일환인데 말이다. 결과가 의미 있는 이유는 결과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과를 맺기까지의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양대 유영만 교수는 저서 『곡선이 이긴다』에서 “행복은 목적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로 가는 수많은 간이역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혹자는 분명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좋은 결과는 대체로 피나는 노력을 거쳐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좋은 결과를 위해 정말 인생에 있어 가치를 두어야 하는 것들을 포기했다면? 건강, 가족, 사람다움을 저당 잡고 일군 결과라면? 그랬다면 정말 그 결과는 가치가 있는 것일까? 유대인에게 배움이란 그 자체로 즐거움이며, 하나님과 그의 지혜를 터득해 가는 과정이다. 유대인에게 배움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닌 인생 그 자체인데, 유대인은 배움을 즐기고 삶에 잘 적용시키지 않는가? 고로 유대인에게 인생은 즐거운 것이 되는 것이다. 또 공부의 동기 자체가 선한다 보니 지나친 경쟁으로 개인주의화 되는 한국인과 달리 이타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과정이 결과보다 우선시 될 때 사람다움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