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유대인의 인성 교육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에 매우 헌신적이다. 그러나 이는 자녀가 세속적으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유대인 부모는 자녀가 궁극적으로 ‘온전한 인격체’, 즉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둥글둥글한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길 원한다. 공부의 끝이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과 몸,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사람의 몸은 작다. 그러나 마음은 전 세계를 덮을 만큼 커질 수 있다. 마음의 밑바닥까지 알아낸다면 전 우주의 비밀을 밝혀낸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이라면 모두 이러한 가르침을 배우고 삶 속에서 이것을 항상 상기하며 살아간다.
‘성공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이 떠오르는가? 보편적으로는 경제적 성공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르다. 높은 학구열과 사회적 지위와 같은 대외적 이미지와 반대로 그들에게 진정한 성공이란 멘쉬로 거듭나는 것이다. 멘쉬란 도의적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받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자녀가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자녀가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격자로 거듭나는 것을 훨씬 더 선호한다.
유대인들이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게 된 것은 인류 모두가 하나라는 관념에서 시작됐다. 인류는 하나이기에 연대하여 함께 살아가고, 어떤 것이든 협력하여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단 하나의 인간 아담을 창조했다. 어째서 수 천, 수 만 명이 아닌 아담 한 명만을 창조했을까?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모든 인류를 살상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을 구함이다”라고 탈무드는 말한다.
이런 연유로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공부는 인격을 성장시키는 공부다. 인격을 성장시키지 못하는 공부는 인간을 교만케 만들고, 본인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을 만든다. 인격이 결여된 공부는 모래로 지은 성과 같아 그 힘이 유한하다. 반면에 인격이 자라나는 진정한 공부를 한 자의 힘은 무한하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훌륭한 인품이 주는 감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성공학 작가 새뮤엘 스마일즈는 말했다. “천재성은 언제나 감탄의 대상이다. 그러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격이다. 천재는 사람들에게 찬미를 받지만, 인격적인 사람은 사람들에게 신봉을 받는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대 아테네의 몰락이 이것을 명쾌하게 입증한다. 당대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최초로 성공시킨 국가로써 주변국들에 비해 매우 선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진 시민들은 점차 도덕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자유라는 명분 하에 시민들은 무분별하게 욕망을 해소했고, 결국 이는 인격적 타락을 야기했다. 하향 평준화된 시민들의 의식 수준은 군중 정치를 우매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그 결과 아테네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마틴 루터는 말했다. “한 국가의 번영을 결정짓는 것은 풍부한 재정이나 튼튼한 요새나 아름다운 공공건물이 아니라, 교양 있는 시민이 많은가 하는 것이다. 즉 많이 배운, ‘깨어 있는’ 인격자로 구성되어 있는 한 국가의 번영을 결정짓는다는 말이다. 한 국가의 진정한 이익, 진정한 강점, 진정한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것에서다.” 외적인 화려함은 인간을 잠시나마 빛나게 만든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인격을 무시한 채 외적인 요소에 집착하게 되면 그 끝은 항상 불행하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이타적인 마음, 사랑에 있다. 인격이 말살된 공부는 그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공부로서의 역할을 사형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유대 교육의 틀이라고 불리는 파르데스는 1차원 학교 공부부터 영성을 다루는 4차원 교육이 있다. 1차원부터 교육시키는 것이 보편적인 경우지만, 인격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아이들의 심성을 다루기 위해 4차원 교육을 가장 먼저 시킨다. 13세를 넘기면 인성의 틀을 바로잡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녀에게 무생물체를 대할 때도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야만 인격체를 대할 때도 배려하고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인품을 겸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유치원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흙을 만지고 화초, 채소를 심고 가꾸는 활동을 한다. 화초를 심고 가꾸며 아이들의 심성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다.
인격이 말살된 공부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교육은 죽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육은 상대평가로 학생들의 등수를 매기는데, 이는 학생들에게 극도의 경쟁심리를 유발한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법률소비자연맹이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10억 원을 주면 1년 정도 교도소 생활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학생의 51.39%가 동의했다. 이는 결과, 성과 중심주의의 한국 교육이 학생들의 윤리적 가치를 얼마나 실추시켰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근래 한국에는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는 배제한 채 본인의 자유와 권리만을 챙기려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인다. 어린 나이부터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져 실리를 챙기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강박이 학습된 결과다. 이는 학생들에게 이타적인 사람은 세상 물정을 몰라 순진한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 영리한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기적인 자는 능력이 출중하여 성공하여도 그 순간을 영속시키지 못한다. 또 그런 성공에는 행복이 있을 리 만무하다. 성공도, 행복도 사람을 통해서 오는데 이기적인 사람을 따를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이기심으로 일군 성공은 한순간이며, 그 끝에는 외로움만이 기다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녀가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인격자가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살 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성공도, 행복도 자연스레 따라오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라손하라’를 경계하라고 강조한다. 라손하라란 ‘나쁜 혀’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유대 경전 미드라쉬는 “남을 헐뜯는 것은 살인보다 위험하다. 살인은 한 명만 죽이지만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 이상을 죽인다. 퍼뜨리는 자, 그것을 듣는 자,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자 모두를 죽인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자녀가 친구를 사귈 때 험담은 물론 아니라 자기만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사람을 대하는 인성과 사교성은 가정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아이는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의 언행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족이 한 데 모여 식사를 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밥상머리는 집안의 어른들이 후세에게 과거의 경험과 지혜를 전해주는 자리였다. 한국인들에게 밥상머리는 단순히 식사자리가 아닌 마음의 살을 찌우는 장소였다. 이때 배우는 예절과 예의, 삶의 지혜는 인간관계를 맺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회가 각박해지고 이기주의가 확산됨에 따라 비혼 가구의 비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즉 아이들의 인성과 사교성이 길러지는 장소가 사리지고 있다.
<대화의 기적>의 저자 루엘 엘 하우는 “몸에 피가 흘러야 한다면, 사랑에는 대화가 흘러야 한다. 피가 멈추었을 때, 그 몸이 죽기 시작하듯, 만약 대화가 멈춘다면 사랑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죽은 몸은 살리지 못하지만 대화는 죽은 관계를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 이것이 대화의 기적이다”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시간은 자녀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라고 생각한다. 식사 동안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아이의 심성을 판가름 짓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어떤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가족과의 식사 시간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중요한 사안이라면 동업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정도다.
그들은 자녀가 가족이 가져다줄 수 있는 돈독함을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그래서 식사 도중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는 양질의 대화가 오고 가지 않기 때문이다. 심성을 기르기 위한 밥상머리가 오히려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과 탈무드, 유대 역사 등과 같이 깊이 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자녀의 심리적 안정감과 지성과 통찰력을 동시에 길러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와 같은 교육 덕에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흩어졌음에도 동질성을 유지하고, 부활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기대어 서로 의지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사람이란 홀로 살아갈 수 없음을, ‘나’는 ‘너’가 존재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더불어 살 때 존재가치가 빛난다. 공부의 목적은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법을 배움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사회에 병패를 야기하고, 혼란과 갈등을 빚고 있다. 국가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장했지만,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그에 발맞춰 가지 못하고 있다. 마치 고대 아테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고,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자녀도, 나라도 존속할 수 있다. 2000년간의 디아스포라에도 불구하고 번영했던 유대인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