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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준 Jul 05. 2022

변화의 두려움에 적극적으로
응전하라

두려움을 극복하고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내는 유대인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한 예로 봉변(逢變)이라는 단어는 만날 봉(逢)과 변할 변(變)이라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즉 봉변은 ‘변화를 만나다’라는 의미다. 그러나 봉변은 어떠한 상황에서 쓰이는가? 뜻밖의 당혹스러운 일을 당할 때 쓰인다. 이는 과거서부터 인간이 변화를 마주하는 것을 얼마만큼 두려워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도 같이 타고 태어난다. 인간의 인생을 왜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가? 인간은 태어나고부터 죽기 전까지 매순간 변화를 마주하는데, 이때 몰려오는 두려움을 극복하여 변화를 택할 것인지, 두려움에 잠식되어 과거에 머무를 것인지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짐승과 식물은 태초의 모습, 선조가 행했던 관습을 그대로 표방하여 살아간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본모습에서 절대로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변한다. 모든 생명체들 중 오직 인간만이 본인의 운명을 새로운 방향으로 개척하고자 한다. 인간에겐 자유의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변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변화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변화에는 반드시 곤경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가 변화하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변화를 바라지만 감수해야 될 고통이 따르기에 대다수가 현실에 안주하며 산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변화에 능숙하다. 어떻게 변화에 익숙해진 것일까? 그들이 밟아온 격동의 역사에 그 해답이 있다. 그들은 제2차 디아스포라 이후 136개국에 흩어졌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이 재건되기까지 항상 핍박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년도 아니고 2000년 동안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상상이나 가는가? 기독교 사회였던 과거 유럽은 기독교의 교리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학살해왔다. 한 예로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뒤덮었을 당시 유대인들만 흑사병에 덜 걸렸다. 이는 위생수칙에 철저한 유대교의 교리를 따랐기 때문인데, 이를 본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흑사병 창궐의 주범으로 몰아 그들을 학살한다.


 외에도 그들은 2000년간 십자군, 나치 등 여러 집단에 의해 약탈, 박해, 학살을 당했다. 항시 절체절명의 위험에 노출된 유대인들은 현재에 안주할 수 없었다. 언제라도 민족이 절멸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었기에 한 곳에 터를 잡고 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종주민족으로 전락하거나 타국의 문화에 융화되지 않았다. 놀랍지 않은가? 타국에 잠식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해답은 바로 변화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프트멘슈, 공기인간이라는 별칭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했던 유대인들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공기와 같이 변화에 금세 적응하는 유대 민족의 유구한 지혜는 그들의 DNA에 깊이 각인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성공을 거둔 것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창업 국가 이스라엘에서 스타트업의 대부로 일컬어지며, 이동식 USB 스틱을 최초로 개발한 유대인 도브 모란은 조선일보의 인터뷰에서 유대인들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구술했다. “이스라엘에는 모험적인 사업가가 정말 많다. 이것은 유대인의 특성이다. 지난 2000년간 유대인은 항상 쫓기고 핍박 받아왔다. 늘 유랑했다. 기업가 정신이 없었다면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어려웠다. 사방이 적으로 포위되었다. 혁신이 굉장히 필요했다.”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탈무드의 애독자였는데, 그는 탈무드에 있는 말을 노트에 옮겨 적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옮겨 적은 것들 중에는, ‘현재는 항상 미래를 향한 출발선이다’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또 그는 “현재는 어떤 때일까, 현재는 언제나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때”라고 말했다. 새 출발, 즉 현재는 언제나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때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던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항상 미래를 향해 가고 있고, 변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현재는 앞으로 다가올 새롭게 변화될 시간의 전조인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영원할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런 변화도 찾아오지 않는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안락한 장소, 고향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도전은 쓸 데 없는 것이라 치부하고, 심신을 고생시키려 하지 않는다. 삶의 풍파를 기피하고 최대한 평온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녕 인간의 본질일까? 사실 우리 모두 변화를 동경하고 열망한다. 마음 저 깊숙한 곳에는 현재의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얻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변화가 불러올 곤경이 두려워 변화가 싫다고 속이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싫어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변화가 불러올 불확실한 미래 말이다.


 뇌는 변화를 거부하지만, 역설적으로 변화를 통해 성장한다. 이는 과학자 굴드와 그로스가 과학 잡지 ‘사이언스(Science)’에 이에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며 입증된 사실이다. 인간의 뇌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발달된다. 태어나고서부터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 뇌의 신경회로, 시냅스는 더욱 정교하고 복잡해진다. 자극이 많은 만큼 뇌의 발달속도는 빨라진다. 인간 뇌의 무게는 태어나고 12세가 되기까지 약 3~4배까지 증가한다. 나아가 뇌에는 가소성이 있어 나이를 먹더라도 자극을 통해 뇌를 발달시킬 수 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온 세상 만물 중 오직 인간만이 부여받은 특별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변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을 망각한 채 햄스터가 쳇바퀴 돌듯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간다. 이런 삶 안에서 도대체 어떤 가치가 피어날 수 있을까? 가치가 창출되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삶에서 과연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난 이유가 고작 반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일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본질 아니던가? 한국의 시류는 인간의 본질을 거스르고 있다. 변화를 갈망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는커녕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심지어 휘황찬란한 꿈을 꾸어야 마땅한 아이들조차 공무원이 될 것이라며 삶을 평가절하 한다. 


 공무원을 비하할 의도는 일체 없다. 오히려 공무원을 존경하는 입장임을 밝힌다. 시험의 난이도는 물론, 어마 무시한 경쟁률을 극복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공무원이 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공무원이 되려는 ‘동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행정에 관심을 갖고 국가의 한 축이 되고자 공무원을 꿈꾸는 어린 아이들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성인도 마찬가지다.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공무원이 되고 싶은 게 아닌가? 이는 정말 경각심을 갖고 장고해보아야 할 사안이다. 한국에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생각으로는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게 되며, 변화가 없으니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탈무드는 “인간은 곤경을 견뎌냄으로써 쇠가 불구덩이 속에서 단련되는 것처럼 성장한다”고 말한다. 곤경은 잘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성장의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유대인이 시련을 통해 현재의 기업가 정신을 탑재하게 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봉변, 즉 변화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움 때문에 죽는 경우는 없다. 변화는 내게 독이 되는 것이 아닌 도움을 주는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변화는 곤경과 함께 오지만, 그 끝에는 성장의 기회가 찾아옴이 분명하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며, 기회는 오직 변화의 두려움에 적극적으로 응전한 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룩한 자는 불우한 과거를 딛고 금의환향한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유대인 부호들 중엔 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고선 벼랑 끝서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인텔의 대표였던 앤디 그로브는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헝가리에서 빈털터리 생활을 했다. 스타벅스를 세계 최대의 커피 프렌차이즈로 성장시킨 하워드 슐츠 최장은 뉴욕의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최고의 투자가 조지 소로스도, 로스차일드가를 일으켜 세운 장본인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도 가난한 유년 시절을 지냈다. 그들이 과거를 극복하고 부자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끊임없이 변화를 도모한 끝에 기회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변화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여 겁낼 필요 없다. 단기간에 내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과욕일뿐더러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다만 변화시키고 싶은 한 가지에 집중하라. 한 번에 많은, 장대한 목표를 세우게 되면 의욕을 저하시켜 시도조차 꺼려지게 만든다. 변화에 대한 반감이 클수록 당장에 실행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목표를 세워보자. 그것부터 변화시키고자 노력해보자.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 딱 한 가지라도 변화한 게 있다면 성공한 것이다. 정신분석가 디오도어 루빈은 이렇게 말했다. “치밀하고 합리적인 계획은 성공하지만, 어떤 느낌이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의한 행동은 실패하는 경우가 다분하다. 큰 목표일수록 잘게 썰어라.” 


 ‘미미한 변화가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냐’고 생각할 수 있다. 당장에는 아무런 변화도 체감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사소한 변화가 점진적으로 누적되면 시련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변한다. 그렇게 되면 원대한 목표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 성공 또한 쟁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공은 변화를 꿈꾸는 인간의 본질을 충실히 이행했을 때 물질적으로 구체화 된 결과물이다. 제프 헤이든은 본인의 저서 『스몰빅』에 “작은 성공이 반복하여 쌓일 때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변하고자 하는 마음은 쉽게 먹을 수 있다. 마음먹은 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고행인 것이다. 변화하고 성장하길 원함과 동시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인간의 모순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해도 시간은 흐르며, 시대가 변화를 강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어느 때보다 빠르고, 광대한 변화를 요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말이다. 변화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기회다. 뇌에는 가소성이 있기 때문에 변화를 하고자 마음먹고 ‘실행’한다면 누구나 변화할 수 있다. 




청춘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지.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있어

사람들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雪]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氷]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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