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등 뒤

4. 전시 첫날

by 바람처럼



전시장 문이 열리자, 향긋한 꽃내음이 스며들었다.

지인들이 보낸 축하 화환과 꽃다발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작품 옆에 붙은 제목과 설명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입구로 돌아왔다.


“작가님, 떨리죠?”

큐레이터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요… 떨리기보다는, 그냥 좀…

숨이 길어지는 기분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손끝이 살짝 떨렸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품 앞에서 오래 서 있는 이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친구들…

그 모든 풍경이 영화 속 장면처럼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입구 쪽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가 희끗해진 남자가 꽃이 담긴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오랜만이네, 나연 씨.”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한순간 숨이 막혔다.


그는 그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니던 옛 친구였다.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잠깐 마주치고,

그 후로 연락이 끊겼던 사람.


“그날, 두물머리에서 너희 뒤에 나도 있었어.”

그가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오래된 필름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심장이 크게 울렸다.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희끗한 필름 속에는 두물머리의 햇살 아래,

그가 카메라를 든 채 나를 바라보는 모습,

내가 웃고 있던 뒷모습, 그리고 우리가 함께 걸었던 길이 담겨 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스캐너 위에 사진을 올리고, 컴퓨터 화면 속으로 그 조각들을 옮기며 내 안에 묻혀 있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깨어났다.


그와 나눴던 대화, 웃음, 그리고 묵묵히 서로를 지켜주던 시간들.

비록 지금은 그가 없지만,

사진 속 그 순간들은 여전히 나와 함께 숨 쉬고 있었다.



5. 새로운 길 위에서

사진 속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자꾸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카메라 가방을 챙겼다.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또렷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두물머리 입구의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목덜미를 식혔다.

“요즘 자주 나오시네요.”

매표소 옆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좀 다시 찍어보려고요.”


강가로 내려가자 물 위에 아침빛이 얇게 깔려 있었다.

예전엔 그가 먼저 카메라를 들던 자리였다.

오늘은 내가 먼저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가 물 위로 번졌다.

벤치에 앉아 사진을 확인하는데, 옆에 앉은 노인이 말했다.

“빛이 참 좋죠?”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웃었다.

“네. 오늘은, 특히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돌아오는 길,

작은 카페에 들렀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방금 찍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물결 위에 빛이 흩어져 있었다.

그 속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엄마, 오늘도 사진 찍으러 갔어?”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어 보냈다.

“응. 오늘 빛이 좋아.”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아버지가 좋아할 사진이네.”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카페 문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천천히 걸었다.


밤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불을 끄려는데

현관 쪽에서 익숙한 소리가 났다.

사박, 사박.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예전 같으면 숨부터 멈췄을 것이다.

귀를 세우고, 심장이 먼저 반응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잠깐 듣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발자국 소리는 현관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사라졌다.

나는 수건으로 손을 닦고 천천히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밤공기만 들어왔다.

예전엔 이 장면이 가슴을 비웠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현관 앞에 떨어진 낙엽을 보며 나는 웃었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거실 벽에 걸린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두물머리의 빛.

물 위에 번지던 햇살.

그리고 오늘의 풍경.

나는 그 앞에 잠시 섰다.


기다림은 이미 내 등 뒤로 가 있었다.

앞에는 내가 걸어갈 길이 놓여 있었다.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그 밤, 나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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