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및 에세이
민영아, 나는 네가 빌딩숲 속에서 계속 살아가더라도 가슴 속엔 피톤치드를 담고 있었으면 좋겠어. 겉은 한국인이지만 폐부엔 생기 가득한 엽록소가 흐르고 있는 그런 사람. 일단 나는 그런 사람이 되려구.
성적표의 김민영이란 영화명은 어째선지 다소 갑갑하게 느껴진다. 민영이의 성적표라는 말보다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말은 어딘가 모르게 민영이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마치 그 영역 안에 갇힌 우리들의 삶을 은유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는 대입을 기점으로 손쉽게 인생의 무언가가 잘려나가곤 하는데, 고등학교까지가 전생이라면 성인이 된 이후로는 후생을 사는 느낌이다. 단절된 전생의 기억이 종종 떠오르곤 하지만 돌아갈 순 없고 과거에 대한 향수는 유아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된다. 굳이 신자유주의적 경쟁구도 때문이라는 낡은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저 이것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속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성장기가 길고 쓸데없이 사고 체계가 발달해서 성체가 되기 전까지 쌓이는 꿈과 소망의 양이 너무 많다. 그러니 성체가 되어도 계속 하염없이 뒤를 돌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을 보고 있는 개체들도 사실 마음 속 어딘가에선 그들만의 노스텔지어를 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퇴행적이니, 유아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는 말로 스스로를 상처 주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18년 동안 쌓인 기억과 추억과 소망을 어떻게 가위로 오려내듯이 잘라낼 수 있을까. 만약 정말로 인간이 생기를 머금은 존재라면 그렇게 잘라낼 때 핏물이 철철 흐를 것이다.
서울 집에서 민영이와 정희가 함께하는 씬들을 보면 마치 내면의 두 자아가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의 끈을 잡으려고 비틀거리는 민영이(성인 자아)와 아직도 추억과 바람들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정희(어린이 자아)는 멀어도 너무 멀어졌다. 청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듯 정희가 빙산의 밑에서 수면 위까지 올라왔으나 민영이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하지만, 정희는 민영이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반응은 민영이가 민영이에게 하는 것이다. 화를 내고 나무라는 순간에도 민영이는 스스로 상처가 되고 있다. 민영이는 정희가, 자신의 소망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게 두려운 것이다.
마지막 즈음 씬에서 정희의 그림과 민영이의 그림이(물론 둘다 정희가 그린 거지만) 함께 걸려있는 장면은 영화라는 세계 안에서 민영이와 정희가 혼혈로서 함께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약초를 캐내고 있는 민영이를 카메라가 응시하는 동안에는 민영이도 나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